尹 정부 노동개혁과 노동이사제 상충...개혁 차질 우려
현장에서 이중적 정체성 혼란 겪어
금융권도 도입 두고 끝까지 고심 중
노동이사제가 도입 초기부터 실효성에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노조의 입장을 대변하는 창구로 경영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여전한 데다 업무 가중에 보상도 없어 일부 공기업에선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어 적임자를 찾기도 쉽지 않다고 한다. 정부와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노조가 선출한 노동이사들이 공기업 개혁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노조 입깁 창구 우려=13일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안에 따르면 과반수 노조가 있는 경우 노조대표가 2명이내의 후보자를 임원추천위원회에 추천하고, 과반수 노조가 없는 경우 직접·비밀·무기명 투표로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얻은 2명이내의 후보자를 임원추천위원회에 추천할수 있다.
하지만, 지난 8월 시행령이 첫 적용될 당시 대상 공공기관 130곳 중 115곳이 과반 노조를 갖고 있어 대부분 노동이사가 노조의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왔다. 이후 적용 대상 공공기관이 87곳으로 줄었으나 대부분 기관은 과반 노조가 있어 사실상 노조가 노동이사를 선출하는 구조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노동이사는 그 조직의 근로자를 대표하는 이사인데 노조가 뽑은 사람하고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며 "최근 노조에 대한 국민의 관점과 신뢰 수준을 고려하면 지지를 받지 못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추진 중인 노동개혁과 노동이사제가 상충한다는 지적도 있다. 윤석열 정부는 노사 법치 확립을 앞세운 노동시장 이중구조 타파 등을 골자로 한 노동개혁을 추진 중이다. 신 교수는 "윤석열 대통령이 선거 공약에서 노동이사제를 인정했어도 그 과정에서 반드시 노조를 거쳐야만 한다는 법은 없으므로 개선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혼란 겪는 노동이사들=공기업 관계자들은 "근로자의 입장을 전하는 창구로 순기능도 있지만 노동이사가 보상이 없는 데다 경영진과 노조 사이에서 고립돼 경계인이 되는 정체성 혼란을 겪는 경우도 적지않다"고 전한다.
한국노동연구원은 2020년 3월 '서울시 노동이사제 운영실태와 쟁점'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노동이사들이 이중적 정체성을 겪는다고 진단했다. 서울시는 정부보다 6년 빨리 노동이사제를 도입했다. 서울시는 상시 근로자 100명 이상 산하 16개 기관이 노동이사를 두도록 의무화했다.
연구원에 따르면 노동이사들이 평소 직속 상사와 경영진의 업무 지시를 받는 근로자로 일하다가 이사회 의결에 이사로 참여하는데, 이러한 이중적 정체성으로 인한 혼란으로 현업과 이사활동 모두 어려움을 겪는 역기능 측면이 두드러졌다. 노동이사가 현업을 하면서 자유롭게 이사회에 가서 사측에 대해 발언하고 조직 내 쟁점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고, 사측은 노동이사를 이사회 참여자가 아닌 또 다른 노조 대표 등 감시자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근로자 집단에서도 노동이사는 녹아들지 못했다. 연구원 설문에 응답한 한 기관의 노동이사는 "노조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회의실을 찾아갔는데, 제가 들어가자 모두 말을 멈추고 회의 자료를 다 치웠는데 이런 사례가 정말 많다"고 말했다.
연구원은 "노사 양쪽으로부터 모두 고립되어 곤란을 겪는 상황이 빈번하게 생겨나고 있다"며 "노동이사제가 생소한 기존 조직 구조와 문화 속에서 냉소적 혹은 적대적인 분위기를 감당해야 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부 공기업에서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는 이유로 보인다.
◇모두가 불편한 제도, 사기업은 '어불성설'=공공기관 다음으로 노동이사제 논란이 뜨거운 곳은 금융권이다. KB국민은행 노조는 올해까지 여섯 차례 사외이사 후보를 추천했으나 모두 무산됐다.
지난달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현재 각 금융지주 회장이 관행 변경을 통해 임원후보추천위원회나 사외이사를 합리적으로 구성할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며 "다만 큰 틀의 문제가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노동이사제를 지금 바로 도입하는 것을 두고 당장 논의를 적극적으로 하는지에 대해선 조금 신중한 생각은 있다"고 말했다.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사 ISS도 KB국민은행 노조 추천 사외이사 후보 선임에 공식적으로 반대 의견을 냈다. 다른 사외이사 후보와 마찬가지로, 노조 추천 사외이사 선임 여부는 그 후보가 주주의 이익을 위해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가에 따라 결정돼야 한다는 것이 ISS의 견해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노동이사제는 해외에서도 기업의 혁신 저해, 외국인 투자 기피, 이사회의 의사결정 지연, 주주 이익 침해 등의 이유로 비판이 많은 제도"라며 "공공기관의 노동이사제 도입이 졸속으로 추진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향후 민간기업에 대한 도입 확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고 비판했다.정석준기자 mp1256@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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