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오바마도 반한 그 옷은 '새빨간 거짓말'로 시작됐다 [WSJ 서평]
프레피 룩의 왕국: 제이크루의 흥망성쇠
매기 블록 지음
데이 스트리트 북스 / 368쪽
유행은 돌고 돈다. 단정하고 고전적인 느낌의 ‘프레피 룩’도 10년 주기로 부활한다. 패션 저널리스트 매기 블록은 그의 책 '프레피 룩의 왕국: 제이크루의 흥망성쇠'에서 프레피 룩이 계속해서 살아남는 이유를 설명한다. “프레피 룩은 늘 변화한다. 또 여러 세대에 걸쳐 이미 미국 문화의 일부가 됐다.”
프레피 룩은 무엇일까. 대학 진학을 앞둔 고등학생을 뜻하는 ‘프렙(prep)’에서 따온 말로, 미국 동부 명문 사립학교 학생들의 옷차림을 일컫는다. 단추를 단정히 채운 옥스퍼드 셔츠와 베이지색 면바지, 거기에 남색 재킷을 걸친 아이비리그 대학생을 떠올리기 쉽다.
‘위대한 개츠비’ 속 성공한 사업가들이나 유력 정치인 등 점잖은 상류층들의 사교모임 복장 같기도 하다. 한 마디로 ‘부유한 백인’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프레피 룩은 백인 상류층의 전유물이 아니다. 프레피 룩의 시작은 ‘패션의 대중화’다. 과거 ‘신사’들은 양복점에서 정장을 맞춰 입었지만 1818년 헨리 브룩스가 최초의 남성 기성복을 내놓으며 의류 소비를 혁신적으로 바꿨다. 공장 노동자들도 저렴한 가격에 ‘신사처럼’ 입고 다닐 수 있게 됐다.
1920년대 아이비리그 대학생들은 사회에 진출한 선배들의 복장을 따라 입기 시작했다. 이게 프레피 룩이다. 뉴욕 주간지 ‘빌리지 보이스’는 “프레피 옷의 재봉선 사이로 백인 문화가 새어 나온다”라고 했지만, 흑인 재즈 음악가 마일스 데이비스도 프레피 룩을 즐겨 입었다. 최근 패션잡지 ‘바자(Bazaar)’는 “오늘날 프레피 룩은 흑인 문화 없이는 성립할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프레피 룩의 중심에는 미국 의류 브랜드 제이크루(J. Crew)가 있었다. 이들만큼 프레피 룩을 분명히 보여준 브랜드는 없었다. 제이크루는 미국인들이 ‘무엇을 입고 싶은지’, 또 ‘무엇이 되고 싶은지’ 그 열망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제이크루는 1983년 아서 시나이더가 설립했다. 뼛속까지 장사꾼이었던 그는 프레피 룩 분야에서 돈 냄새를 맡았다. 당시 ‘랄프 로렌’은 특유의 ‘폴로’ 로고로 구매력 높은 미국 명문 사립 고교생들 사이에서 인기몰이 중이었다.
보다 저렴하게 옷을 낸 ‘렌즈 엔드’도 고급 브랜드로 여겨지진 않았지만 짭짤한 이익을 거두고 있었다. 시나이더는 둘 사이 틈새시장을 노렸다. 그의 전략은 랄프 로렌의 고급스러운 스타일을 렌즈 엔드의 가격으로 선보이는 것이었다.
흥행을 위해선 브랜드의 정통성을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가 필요했다. 그는 첫 카탈로그에 이렇게 홍보했다. “제이크루는 럭비, 라크로스와 조정 경기 의류에서 100년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모두 아이비리그 학생들이 즐길만한 스포츠였다.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이 문구는 미국인들의 가슴 속 무언가를 건드렸다. 제이크루는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제이크루의 인기는 어느 정도였을까. 미국의 유명 방송인 데이비드 레터맨이 그의 대표 코너 ‘탑 텐 리스트’에서 언급할 만큼 화제였다. 주간지 ‘뉴요커’의 풍자만화에서도 당시 중년 남성들까지 제이크루의 스타일을 따라 입는 삽화가 실릴 정도였다. 인터넷상에선 제이크루 팬클럽들이 생겨났다.
2008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미셸 오바마가 어느 토크쇼에서 한 말은 패션 업계의 전설로 남았다. 사회자는 그녀의 옷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입은 옷을 다 합치면 6만~7만 달러(약 8000만~9000만원) 정도 됩니까?”라고 물었다. 미래의 영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사실 이건 제이크루 앙상블입니다.”
제이크루 브랜드의 진가를 더한 건 아서 시나이더의 딸 에밀리다. 1986년에 회사를 물려받은 그는 제이크루를 재탄생시켰다. 프레피 룩을 재해석했다. 일본어로 ‘와비사비’라고도 불리는 불완전함의 미학이 그의 패션 철학이었다.
브랜드의 상징이 된 ‘롤넥 스웨터’를 고안해 냈다. 이 옷의 특징은 목 끝부분이 돌돌 말려 마치 완벽하게 마감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에밀리는 여백을 통해 은근한 멋을 뽐내는 게 프레피 룩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브랜드의 로고도 없앴다. 옷 곳곳에 로고가 새겨진 랄프 로렌의 옷과 대비됐다. 그에 따르면 랄프 로렌은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 진정한 프레피 룩은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을.
에밀리는 의류 카탈로그에도 관심을 쏟았다. 여대생들 사이에서 즉석 모임을 열고 제이크루 카탈로그를 보는 것은 하나의 문화가 됐다. 하지만 와비사비 양식의 카탈로그를 만드는 과정엔 어려움이 많았다. 작은 디테일마저도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는 모델의 신발에 일부러 진흙을 묻혔다. 편안한 착용감을 강조하기 위해 새 옷을 건조기에 돌려 의도적으로 구겼다. 모델들은 실제로 휴가를 즐기듯 해변에서 모닥불을 피우거나 요트 위에서 농담을 나누는 장면을 연출했다.
카탈로그마다 카메라 필름 8000통 정도를 사용했다. 편집 과정에선 너무 ‘모델 같은’ 인위적인 사진들은 퇴짜 맞았다. 최고의 작품은 ‘스냅 사진이라고 봐도 무방한’ 자연스러운 이미지였다.
1989년 제이크루의 연 매출액은 1억6000만 달러(약 2100억원) 규모로 성장했다. 전설적인 슈퍼모델 린다 에반젤리스타를 카탈로그 표지에 섭외했다. 그녀는 파란색 셔츠를 입고, 광대가 돋보이는 특유의 백만불짜리 미소를 지었다. 그게 바로 제이크루가 추구하던 이미지였다.
저자는 제이크루 관계자에게 “그녀가 성공적으로 촬영을 마친 뒤 뭘 요구하던가요?”라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촬영 때 입은 옷들뿐이었다. 그녀는 그 옷들을 다 가져갔다.”
영원한 영광은 없었던 것일까. ‘프레피 룩의 왕국’을 세운 제이크루는 2020년에 파산 신청을 했다. 업계에 따르면 오래전부터 예정된 수순이었다고 한다. 파산의 원인은 평범했다.
트렌드 변화, 품질 관리 문제, 무리한 사업 확장 등. 회사는 회생해서 다시 운영하고 있지만,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10년마다 죽었다 살아나는 프레피 룩은 어떨까? 늘 그랬듯, 잘 나가고 있다.
이 글은 WSJ에 실린 빌 히비의 서평(2023년 4월 3일) 'The Kingdom of Prep Review: Putting on Appearances'를 번역·편집한 것입니다.
정리=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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