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덕동 식물유치원’, 재개발 구역에서 식물을 구조하다 [사람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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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 구역에는 많은 것이 버려진다.
평소 식물을 좋아하던 그는 이것들을 '구조'하기로 마음먹었다.
애써 구조해온 식물들은 자주, 쉽게 죽었다.
사람들이 마음에 드는 식물을 고르고, 그 식물이 어떻게 구조됐는지 이야기를 백수혜씨가 직접 들려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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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 구역에는 많은 것이 버려진다. 자의든, 타의든 집을 떠나게 된 이들은 사라질 동네에 많은 것을 남겨두고 간다. 2년 전 서울 마포구 공덕동으로 이사한 백수혜씨(36)가 집 주변 재개발 구역을 산책하다 마주한 풍경도 마찬가지였다. 백씨의 눈에 띄는 것은 어지러이 널린 물건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눈엔 푸릇푸릇한 생명이 보였다. 버려진 화분에, 더 이상 아무도 돌보지 않는 화단에, 갈라진 도로의 틈새에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평소 식물을 좋아하던 그는 이것들을 ‘구조’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백씨의 집에는 조그마한 마당이 있었다. 재개발 구역에 남겨진 식물을 캐낸 다음 마당에서 정성껏 기르고, 트위터를 통해 사람들에게 분양했다. 이름은 ‘공덕동 식물유치원’이라고 지었다. “처음엔 버려진 아이들이니까 고아원이라고 해야 하나 싶었는데, 그건 너무 슬프잖아요. 그래서 제가 잘 길러서 졸업시킨다는 의미로 유치원이라고 했어요.”
직접 식물을 기르는 일은 ‘초보 식집사(식물을 키우는 집사)’에게 쉽지 않았다. 애써 구조해온 식물들은 자주, 쉽게 죽었다. 그럴 때마다 도움을 준 것은 인터넷에서 만난 이름 모를 이들이었다.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커뮤니티에 사진을 찍어 올리면 사람들은 그 식물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어떻게 길러야 하는지 조언해줬다. 한 해 두 해 경험이 쌓이고 노하우도 늘었다. 여건상 모든 식물을 구조하지 못하는 환경에서, 잘 자랄 수 있는 종류를 고르는 법을 터득했다.
요즘 백씨가 다니는 곳은 서울 은평구 갈현동 재개발 단지다. 봄이 오자 본격적인 구조 활동이 재개됐다.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을 이곳저곳 다니며 모종삽으로 식물을 캐낸다. 물뿌리개로 뿌리를 흠뻑 적신 다음, 모아놓은 일회용 플라스틱 커피 컵에 구조한 식물을 담아간다. 버려진 화분도 백수혜씨에겐 귀한 물건이다. 그곳에 식물을 길러서 분양받을 이들에게 나눠주곤 한다.
구조 활동을 하는 백수혜씨에게는 비장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백씨는 자신이 즐겁게 할 수 있는 만큼, 지치지 않을 정도로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 그도 올해 들어 활동을 확장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아름다운재단의 ‘변화의 물꼬’ 프로젝트를 통해 지원을 받기 시작해서다. 백씨가 구상하는 것은 ‘유치원 졸업식’이다. 지금까지 구조한 식물들을 개별적으로 분양했지만, 한 달에 한 번 ‘졸업식’을 열어 식물들을 분양하는 행사를 생각 중이다. 사람들이 마음에 드는 식물을 고르고, 그 식물이 어떻게 구조됐는지 이야기를 백수혜씨가 직접 들려주려 한다.
3월27일, 갈현동에서 구조한 식물들을 보며 백수혜씨가 말했다. “이 아이들은 누가 신경 쓰지 않아도 겨울을 잘 이겨냈거든요. 이런 애들이 어딜 가도 건강하게 자라더라고요. 졸업시킬 때까지 또 잘 키워봐야죠.”
주하은 기자 ki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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