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한 위정자들의 나라 [아침햇발]
[아침햇발]
손원제 ㅣ논설위원
정권이 취해 돌아가고 있다. 곳곳에서 삐거덕 소리가 요란한데도, 나는 안 보이고 안 들리니 문제없다는 태도다. 눈치도 안 보고 설명도 안 한다. 하고픈 말만 고함치듯 한다. ‘꼰대’ 취객이 딱 이런 모습일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언론에도 공지하지 않은 비공식 술자리를 떠들썩하게 열었다. 최측근 장관과 윤핵관, 시도지사들이 한 줄로 도열해 대통령을 환송했다. ‘조폭 술자리 같다’는 비판이 들끓자, 대통령실은 “야당 출신 시도지사들도 함께했다”며 “민생 협치의 상징”이라고 해명했다. 협치 대상 1호인 야당 대표와는 취임 1년 다 되도록 한번도 만나지 않은 대통령이 할 말인가?
이번이 아니라도 윤 대통령의 음주 사랑은 유명하다. 그 정신없다는 대선 기간에도 “애주가인 윤 후보의 저녁 회동에서 술자리가 있을 경우를 대비해 오전 일정은 비교적 여유 있게 잡아온 편”이라는 캠프 관계자 언급이 <동아일보>에 보도된 바 있다. 취임 직후 서초동 자택에서 출퇴근할 때 집 근처에서 심야 술자리를 이어가다 불콰한 얼굴로 취객들과 사진을 찍은 적도 있다. 이 때문에 몇번 아침 지각이 전날 술자리 후유증 아니냐는 구설을 자초했다. 지난 방일 때도 1차 사케, 2차 소주·맥주를 들이켰다.
적당한 음주는 커뮤니케이션을 북돋운다. 그러나 윤 대통령 취임 뒤 술자리는 거개 자기편, 편한 이들과 가졌다는 특징이 있다. 정작 격의 없는 소통, 기탄 없는 논의가 오가야 할 자리는 만든 적이 거의 없다. ‘윤핵관’은 돌아가며 관저로 불러 오·만찬을 했지만, 이준석·이재명·이정미는 초대 명단에 없었다. 술을 도구로 활용한다기보다 취기 자체를 즐기려는 게 아니냐는 의문을 불렀다.
음주를 동반한 협상 스타일에 대해서도 우려가 나온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는 최근 <시비에스>(CBS) 라디오에 출연해 “(윤 대통령이) 뭔가를 협상을 할 때 공통점이 마지막에 술을 마시고 뭉개는 방향으로 가는 게 있다”며 “저도 울산 회동 때 그냥 간단하게 3개 조항을 합의하고 바로 술 마시기 회식을 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기시다(일본 총리)와도 아마 저녁을 두번 먹고 그런 게 그런 맥락 아닌가 싶다”며 “약간 리스크가 있다고 봤다. 사실 걱정”이라고 했다.
술로 악명을 떨친 국가 지도자로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이 있다. 미국 방문 도중 한밤중에 영빈관인 블레어 하우스 밖에서 팬티 차림으로 서성이다 백악관 경호 요원에게 포착됐다. “뭐 하고 계시냐”는 요원 질문에 혀 꼬인 소리로 “피자가 먹고 싶어서”라고 웅얼거렸다고 한다. 아일랜드를 방문했다가 취해 잠든 채로 비행기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되돌아간 적도 있다. 대통령의 알코올 남용이 국정 최대 리스크였던 생생한 ‘반면교사’다.
윗물에 술내가 진동하는데, 아랫물이 맑을 리 없다. 요즘 집권세력 전반에서 긴장감을 찾아볼 수 없다. 최근 산불 사태 와중에 김영환 충북도지사는 술자리에 참석했고, 김진태 강원도지사는 한가로이 골프연습장을 찾았다. 이런 무책임이 없다.
대통령실에선 국가안보실장과 외교비서관, 의전비서관이 줄줄이 교체됐다. 백악관 만찬 때 ‘블랙핑크’ 공연과 관련한 보고 누락 때문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보고 누락은 문제다. 하지만 이 때문에 국빈방문을 앞두고 안보실이 뒤집어진 것은, 사실이라면 더 어처구니없다. 워낙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지다 보니 블랙핑크에 관심이 큰 ‘누군가’의 불만이 인사 배경 아니냐는 ‘권력 암투설’마저 회자된다. 대통령실은 설명 없이 뭉개기로 일관하고 있다.
집권여당도 나사가 단단히 빠졌다. 김재원 수석최고위원은 ‘5·18 정신 헌법 전문 게재 반대’, ‘전광훈 천하통일’, ‘4·3 폄하’ 등 3연속 헛스윙을 했다. 당내 극우세력에 아부하는 발언들이다. 그런데도 김기현 대표는 ‘한달 셀프 자숙’을 권고하고 말았다. 전광훈 목사는 지난 전당대회에서 김기현·김재원을 밀었다고 주장한다. 김 대표도 한때 전 목사를 “이사야 같은 선지자”라고 추앙했다. 지금 돌아가는 꼴은 그런 관계가 살아 있다고 볼 수밖에 없게 한다. 당 민생특위 위원장인 조수진 최고위원은 ‘밥 한 공기 다 비우기’를 쌀값 대책이라고 들고나왔다. 대통령의 양곡법 거부권 행사가 정책 대안 없는 무책임한 행위였음을 폭로한 게 어쩌면 성과일지도.
술과 권력에 취한 집권세력의 노랫소리가 드높다. 국민의 원성 또한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는 사실만은 잊지 말기 바란다.
won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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