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희의 정치사기] 고려 숙종의 남경천도와 정치권의 예타면제
고려 숙종 원년(1096년), 술사 김위제는 숙종에게 아뢨다.
"<도선기>라는 책에 따르면, 고려 땅에 개경·서경·남경 3경을 두고 각각 4개월씩 국왕이 머물면 36국이 고려에 조공을 바치고, 왕조를 개국하고 160년이 지난 후에는 남경으로 도읍을 옮겨야 한다고 돼 있습니다."
땅을 보고 미래를 예언하는 풍수도참설을 근거로 수도를 지금의 서울인 남경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당시 고려의 수도는 개경(현 북한 개성시)이었다. 대선 정국 때마다 수도 이전 문제가 선거 쟁점으로 대두하듯이, 수도 천도는 예나 지금이나 모든 계층의 이해관계와 직결되는 민감한 문제였다.
사업을 착수하기까지 무려 4년이 걸렸다. 숙종은1099년 8월부터 자신의 측근세력과 함께 계획을 구체화했고, 이듬해 남경으로 가서 지형을 살폈다. 2년 뒤인 1101년에는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고, 3년 뒤 궁궐을 완성했다.
남경 건설은 한반도 중부지방에 거점도시를 만든다는 의미를 지녔다. 당시 남경과 가까운 경기(현 경기도) 지역 일대는 농경지와 제방, 저습지 개발이 한창이었다.한강 수로를 통해 다른 지역과 상거래도 용이했고, 개경과 남쪽의 하삼도(현 충청·전라·경상도) 지방을 이어주는 교통 요지로 기능하기도 했다. 고려 말 문신 이숭인은 자신의 문집인 도은집( 陶隱集)에 한강 용산 지역을 '토지가 비옥하고, 해상·육상 교통이 좋아 귀인(귀족)들이 자주 다른 사업을 벌였다'고 묘사할 정도였다. 경제적인 명분도 있고 전망도 나쁘진 않은 셈이었다.
그러나 대신들은 반대입장을 내놨다. 남경에 각종 시설을 짓는 과정에서 국가 재정을 남발할 우려가 크다는 이유였다. 당시 숙종이 남경 건설 뿐만 아니라 금속화폐 유통정책과 여진정벌을 동시 다발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상황도 고려됐다. 두 정책 역시 막대한 국가재정을 필요로 했다. 무엇보다 백성의 조세와 역의 부담이 과중하게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대신들의 우려는 숙종이 죽은 뒤 현실이 됐다. 사업 추진 과정에서 국가 재정은 고갈됐고 , 이를 충당하느라 백성들의 세금은 과도하게 부과됐다. 남경 건설 사업에 동원된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숙종의 아들인 예종이 즉위한 무렵의 기록에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비었다(十室九空)'고 나오듯이, 고향을 버리고 도망하는 백성들이 늘어갔다. 결국 숙종의 남경천도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여야는 지난 11일 국가 재정 수백억원이 투입되는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에 대한 '예비타당성조사'(예타) 면제 기준을 총 사업비 500억 원에서 1000억 원으로 대폭 완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1000억 원 미만 도로·항만·철도 등 SOC사업은 기획재정부의 예타심사를 받지 않아도 된다. 여야가 총선을 1년여 앞두고 불필요한 재정사업을 걸러내는 자물쇠를 풀어 버린 것이다.
당연히 전문가들은 '재정악화'를 우려하며 반대 의견을 냈다. 지역구 의원들이 국가재정을 내 돈 처럼 쓰며 선심성 SOC사업을 남발할 것이라는 지적까지 나온다. 의원들 입장에선 민원을 해결해주면서 자신의 존재감도 각인시키고 표심도 사로잡고 얻을 이득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미 지역구 현안사업을 위한 선심성 SOC입법은 현실화하고 있다. 포퓰리즘 논란이 일고 있는 지방공항 특별법(대구·경북 신공항 특별법, 광주 군공항 이전 특별법)이 대표적이다. 중부내륙연계발전지역지원 특별법과 광역교통시설 연장과 관련된 국가재정법도 마찬가지다. 모두 예비타당성 면제는 기본으로 전제한다.
문제는 나라빚이 계속 늘고 있다는 점이다. 2022회계연도 국가결산 결과 지난해 중앙정부 채무와 지방정부 순채무(중앙정부에 대한 채무는 제외)를 합친 국가채무는 1067조7000억원이다. 2018년에는 680조5000억원, 2019년 723조2000억원, 2020년 846조6000억원이었다.
국가재정을 남발할 수록 빚은 계속 늘어날 수 밖에 없다. 그 빚은 온전히 국민이 떠앉는다. 국가 재정 역시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운용되기 때문이다. 고려 숙종 시기처럼 세금을 과도하게 올리면서 재정을 충당할 것인가. 서둘러서 재정준칙을 도입해 최소한의 재정방어선이라도 지키길 바란다.김세희기자 saehee0127@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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