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경영지원본부 칼럼] 당나귀의 뒷발질보다는 아기돼지의 솔직함이!

정양범 매경비즈 기자(jung.oungbum@mkinternet.com) 2023. 4. 13.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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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여름 날 바닷가에서 피서를 마친 한 가족이 차를 타고 귀경 중이었다. 충청도 시골 장터에 할머니가 수박 한덩이와 깻잎 몇 묶음 그리고 풋고추 몇 개를 놓고 외롭게 쭈그려 앉아 있었다. 목이 마른 귀경객이 차를 세우고 물었다. “할머니, 수박 얼마면 돼요?”. 다정스럽게 물어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퉁명스러웠다. “알아서 줘유.” 이에 오 천원 한 장을 내밀고 수박을 집으려 하자 할머니가 미동도 안하고 한 마디 던진다. “됐유~ 뽀개서 돼지나 줄뀨”.

지극히 ‘거래적 상황(Transactional Situation)’의 한 장면이다. 지나가는 귀경객과 시골 할머니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오직 수박을 싸게 사고 싶은 마음과 최고의 가격에 팔고자 하는 거래적 동기만 각각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대의 성과(Outcome)를 얻기 위해 여러가지 노하우가 표출된다. 할머니는 가격을 부풀려 부르는 ‘적극적 블러핑(Bluffing)’을 쓴 것은 아니나, 협상학에서 말하는 ‘블러핑 전략’을 구사한 것은 맞다. 오 천원에 팔기보다는 차라리 돼지에게 주겠다는 ‘역설적 블러핑’ 전략에 당황한 귀경객은 아마 칠, 팔 천원 주고 수박을 샀을 것이다.

협상학에서 블러핑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중 내지 준거점(Reference Point)을 전혀 내비치지 않는 허장성세(虛張聲勢)의 하나로 연막 전술이다. 위 상황에서 만일 할머니가 “팔 천원은 줘야 되지유” 라고 말했다면, 귀경객은 할머니의 준거점을 알아챘으니 흥정하여 오, 육천원으로 만족스럽게 수박 거래를 마쳤을지도 모른다. 관계가 중요치 않은 거래에서 양 당사자는 자신의 이익만을 확보하려는 ‘투쟁적 협상’을 하게 마련이다. 이런 투쟁적, 거래적 협상에서는 상대방이 자신의 ZOPA(수용가능범위: Zone of Possible Agreement)와 내부적 기준인 준거점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블러핑 전략을 구사하거나, 상대가 먼저 협상안을 제시하게 하고 그에 맞추어 새로운 조건으로 맞받아 치는 ‘Never First Open’ 전략을 쓰는 것이 보통이다.

협상학의 대가 레위키(Roy J. Lewicki)는 ‘협상상황’에 따라 알맞은 ‘협상전략’을 구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협상상황은 관계(Relationship)와 기대성과(Outcome) 중 어느 것을 더 중요시 하는 지에 따라 몇가지로 분류할 수 있고, 그 협상상황에 따라 각각 다른 협상전략을 구사해야 한다고 권장한다. 할머니와 귀경객의 수박 협상은 레위키의 여러 협상상황 중 하나인 ‘거래적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관계는 무시되고 오직 성과만 중요시 되는데, 그 상황에 적절한 협상전략 중의 하나는 블러핑이다.

그러나 실제로 기업이 당면하는 여러가지 협상 상황 중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위와 같은 단순한 거래적 상황이 아니다. 노조, 고객사 또는 OEM 등과의 상호작용처럼 지속적 관계의 형성 및 유지가 생존에 영향을 주는 ‘관계상황(Relationship Situation)’에서의 협상이다. 레위키가 말한 관계상황에서 블러핑이나 허위정보 유포 등은 위험한 전략으로 삼가해야 할 것이다. 관계상황에서 ‘알고 보니 별거 아닌 상대’로 판명되면 협상력과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생존은 위태로워진다.

중국 귀주(貴州) 지방의 옛날 별칭은 검다는 뜻의 ‘검(黔)’이었다. 검 지방에는 당나귀가 없었다. 그 지방에 살던 사람이 멀리 여행 갔다 오면서 호기심에 당나귀 한 마리를 사왔다. 막상 가져와 보니, 당나귀는 특별히 쓸모도 없고 큰 덩치에 먹기만 하니 산 아래에 풀어 놓았다. 그 산에는 터줏대감 호랑이가 살고 있었는데, 덩치 크고 울음 소리가 쩌렁쩌렁한 당나귀를 처음 보았다. 호랑이는 산신령이 내려온 것이라 지레 겁먹고 감히 접근을 못했다. 그러나 며칠 동안 자세히 관찰해보니 당나귀에게는 “히힝” 하는 큰 목소리와 뒷발질하는 재주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음을 간파하였다. 이에 호랑이는 당나귀를 바로 잡아먹었다.

이 우화를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의 한 명으로 당대(唐代)의 시인 유종원(柳宗元)이 ‘검려지기(黔驢之技; 검 지방 당나귀의 재주)’ 또는 ‘검려기궁(黔驢技窮: 뾰족한 수가 없는 곤궁한 처지)’이라 표현하였으니, 결론적으로 ‘알고 보니 별거 아닌 상대’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장기적 관계가 중시되는 ‘관계상황’ 하의 협상에서 협상력이 약하다면 블러핑 전략보다는 ‘검려기궁’의 상태가 탄로나기 전에 솔직한 태도로써 상대방의 이해와 협조를 이끌어 내는 전략이 더 낫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편으론 파이를 최대한 차지하여 실질적 성과를 내야 할 상황에서는, 서로 정보와 준거점을 공유하고, 당장은 다소 손해일지라도 상대방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다음을 기약하는 등 ‘수용 전략’ 으로 파이를 키워서, 향후 Win-Win 상황의 기초를 다지는 게 더 유리하다고 레위키는 말한다.

약 12년 전, H사는 중남미 최대 시장인 브라질에 자동차 생산공장을 건설했다. 그 나라 기업에게 노조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 동반자라고 법에 규정되어 있다. 즉, 모든 기업은 그 지역 산업별 노조와 임금 및 근로조건을 협상해야 한다. 현지 근로자를 모집하여 교육을 시작하자 곧바로 공장 소재 지역의 금속노조가 몰려왔다. 공장 건설 중이므로 생산도 시작하기 전인데도,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집회와 파업을 일삼으며 압박을 가해 왔다. 그들은 필자와 노무 담당자가 휴가만 가면 그 기회를 이용해 공장에 와 기습 시위를 하는 등, 주 40시간 근로 조건 관철을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했다.

그 공장은 주당 44시간 기본근로를 기준으로 하여 수익성 계산을 했으니, 40시간 요구를 받아들이면 생산성이 떨어지고 시간외 수당 증가 등으로 원가가 10% 이상 상승하게 된다. 원가상승은 바로 가격 경쟁력의 저하이고, 이는 현지 생산의 이점을 모두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이니 생존의 문제로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공장 건설과 판매망 구축까지 다 했으므로 자동차 생산만 하면 되는 중차대한 시점에서 금속노조는 40시간 요구의 기치를 높이 들고 압박해 오니 H사는 특별한 재주없이 호랑이 앞의 당나귀처럼 검려기궁(黔驢技窮)의 위기에 몰렸다.

검려기궁의 상황에서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면서 44시간 근로를 유지하기 위한 협상에는 진솔함 밖에는 왕도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동갑내기 노조 위원장을 불러 솔직히 이야기했다. “지금 우리는 이제 막 태어난 새끼돼지이다. 노조가 40 시간 노동을 계속 요구한다면 새끼돼지가 타사 어미돼지와 경쟁할 수는 없으니, 머지않아 공장은 문 닫아야 한다. 그러면 당신네 금속노조도 조합비를 못 걷으니 수입 창출 기회가 없어진다. 우리가 성공적으로 공장을 가동하여 이 시장에서 성공하면 공장은 곧 2교대, 3교대를 시작하게 되어 조합원 수가 두배, 세배로 늘어날 것이고, 그러면 자동적으로 노조의 수입도 증가할 것이다. 자, 이제 결정해라. 당장 새끼돼지를 잡아먹고 말 것인지, 매년 새끼를 낳는 어미돼지로 성숙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더 큰 파이를 먹을 것인지.”

이에 노조위원장은 타 노조와 상급단체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미돼지로 성장하도록 도와 주기로 결정했다. H사는 여타 자동차 메이커와는 달리 지금도 주 44 시간을 유지하고 있으니, 경쟁사 대비 가격경쟁력을 가지게 되어 시장점유율(M/S)을 크게 올릴 수 있었다. 이후에도 H사와 노조는 관계상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상생적 기반 위에 목표를 공유하면서 동반 성장하여 나누어 먹을 파이를 키웠다. 한때 불경기로 인해 주요 생산 공장이 3교대와 2교대를 폐지하면서 종업원을 해고할 때에도 H사는 1, 2, 3 교대를 모두 꿋꿋하게 유지하며 종업원의 고용안정성(Job Security)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신뢰를 쌓았다. 그런 신뢰가 있었기에 타 메이커와는 달리 매년 임금협상과 단체협상을 아무런 노사분규없이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지켜본 브라질의 좌파 노동당 출신 대통령조차 “H사는 노무관리 모범 업체이니 타 기업들이 이를 배워야 한다” 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떤 기업이든지 협상력이 약한 때가 있다. 그때 목소리 크게 내며 뒷발질 하는 당나귀보다는 솔직한 아기돼지가 더 낫다. 협상 상대방에게 시간과 기회를 주어 성장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보다 더 좋은 관계형성 방법은 없다.

[진의환 매경경영지원본부 칼럼니스트/ 현) 소프트랜더스 고문/ 서울대학교 산학협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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