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싸움만 하던 여야가 지역 사업 ‘타당성 조사’ 면제엔 의기투합
공공 투자 사업을 시행할 때 경제성과 정책 타당성 등을 검증토록 하는 ‘예비타당성조사(예타)’의 면제 대상을 현행 총사업비 500억원 미만에서 1000억 미만으로 완화하는 국가재정법 개정안이 여야 합의로 국회 상임위 소위를 통과했다. 이 법안이 본회의에서 가결되면 도로·철도·공항 등의 지역 민원 사업도 사업비가 1000억원 미만이면 예타 없이 추진할 수 있게 된다. 정치권이 선심성 사업을 벌일 수 있도록 나라 곳간을 열어놓고 세금 낭비를 막을 장치는 뒷전으로 미룬 것이다.
당초 여야는 재정 적자를 GDP의 3% 이내로 유지토록 의무화하는 ‘재정 준칙’과 이 법안을 함께 처리키로 했으나 재정 준칙의 내용에 대한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자 예타 면제 법안부터 통과시켰다. 사사건건 싸우던 여야가 빚내서 돈 뿌리는 일에선 쉽게 의기투합했다.
여야는 예타 면제 기준을 올린 이유로 이 제도가 도입된 24년 전에 비해 경제 규모가 비교할 수 없이 커졌다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예타를 한다고 해서 공공 사업을 못 하는 것이 아니다. 타당하고 경제성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정치권의 매표(買票) 포퓰리즘이 판치는 상황에서 예타는 이를 막는 최소한의 제동 장치다. 여야는 이 장치마저 없애 경제성도 없는 사업을 선심용으로 마구 벌이겠다는 것이다.
역대 정권도 지역 균형 발전이나 사회·경제적 긴급 상황엔 예타를 생략할 수 있다는 예외 조항을 활용해 예타의 관문을 우회하곤 했다. 예타 면제는 이명박 정부 90건(61조원), 박근혜 정부 94건(25조원)에서 문재인 정부 때는 149건(120조원)으로 급증해 예타 제도를 사실상 무력화했다. 문 정부는 2020년 총선을 1년 앞두고 광역시·도별로 사업비가 24조원에 달하는 민원 사업 23개의 예타를 면제해주었다. 남부내륙철도, 울산외곽순환고속도로 등 7개 사업은 이미 예타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았던 것이지만 강행했다. 이미 예타 제도가 유명무실해지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데 문턱마저 낮추면 정치권의 선심 공세는 더욱 거세질 것이 불보듯 뻔하다.
예타의 일부 평가 항목이 현실과 거리가 있다거나 조사 기간이 평균 10.5개월에 달해 단축해야 한다는 지적은 타당한 측면이 있다. 이에 대한 제도적 개선은 필요하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재정 낭비를 막는 예타의 파수꾼 역할은 강화되어야한다. 결코 약화돼서는 안 된다. 예타는 1999년 도입 후 2020년까지 166조원의 예산을 절감한 것으로 평가된다. 세계은행 등도 공공투자 관리 제도의 우수 사례로 한국의 예타를 소개하고 있다. 예타 기준을 낮추더라도 반드시 재정 준칙도 함께 처리해 최소한의 재정 방어선을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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