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 정치는 짧고 사랑은 길다
어떤 인생이든 ‘피가 도는 한순간’이 있다. 화양연화가 오기 전 깊은 고통과 원망, 후회로 움푹 파였던 세월을 가리킨다. 진보당 강성희 의원이 4·5 전주을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당선됐다. 강 의원과 진보당의 ‘피가 도는 한순간’은 짧지 않았다. 현실적으론 당명 개정 후 3년, 정치적 의미까지 보태면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 이후 8년이나 된다.
강 의원 당선과 진보당 부활에 해석이 분분하다. 우선 윤석열 정권과 집권 여당 심판론이 통했다는 것이다. 강 의원은 선거운동과 당선 소감에 이어 지난 10일 첫 등원길에도 “윤석열 검찰독재 심판”을 말했다. 하지만 호남은 보수 심판론이 우세한 지역이라 현 정권 심판을 승리 요인이라 하기엔 다소 머쓱하다. 생활·민생 정치를 당선 동력으로 꼽는 의견도 있다. 진보당이 선거 3개월 전부터 경로당을 찾아 어르신들 음식을 챙기고, 새벽운동 나온 주민들과 호흡하며 거대 양당과 차별화한 것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그러나 정치는 구도·가치·비전이라는 뼈대부터 세워야 하는 종합예술이다. 이를 안정적으로 구축하지 않는 한, 생활·민생 정치는 기술과 수단에 불과하다. 이번 선거에서 진보당의 독자적 가치와 비전이 무엇이었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강 의원과 진보당은 선거운동 내내 ‘민주당 고맙습니다’라는 슬로건을 앞세웠다. 그러면서도 정치 개혁을 다짐했다. 민주당의 무공천을 통 큰 결단이라 치켜세우면서도, 민주당을 적당히 혼내겠다고 호소하는 ‘부드러운 회초리’ 전략이다. ‘친민주당 대리 후보’ 전략이 강 의원 당선을 이끌었다는 것. 완전히 아니라고 할 순 없지만 착시가 낀 결론이다. 임정엽 후보는 민주당 탈당 뒤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사실상 민주당이 ‘내천한’ 후보로 인식됐다. 임 후보는 우세한 인지도와 조직력에도 강 의원에게 약 7%포인트 뒤졌다. 정권심판론만큼은 아니지만, 민주당도 불변의 선택지가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된 셈이다. 특수한 구도, 순도 낮은 지지. 냉정하지만 강 의원 당선 의미는 이 틀을 벗어나기 어렵다.
만약 강 의원과 진보당이 다당제 환경에서 선거를 치렀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민주당에 대한 대응은 당당하지 않았을까. 민주당을 혼내고 싶지만 차마 내치지 못하는 지지층 눈치를 살피며 “우리가 형님 자리 뺏지는 않을게요. 형님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살짝 경고만 줄게요”라는 식의 선거운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의 색깔을 숨길 이유도 없었을 테고. 그렇게 당선됐다면 온전한 제3정당과 대안정치 탄생이라는 평가가 따랐을 게 분명하다. 또, 전북은 같은 호남이라도 광주·전남에 비해 개방과 연대를 주저하지 않는 플랫폼 성격이 강한 지역이다. 안철수 현상, 국민의당 돌풍 등 새 정치 흐름에 민감하게 대응해 왔다. 지역 정치권 관계자는 “선택지가 다양한 환경에서 선거를 치렀다면 진보당이 주권자를 무시하는 ‘민주당 고맙습니다’ 같은 구호를 내걸었겠나. 소선거구제가 유지되는 한 민주당에 대한 역진이 아무리 강해도 지역 주권자 입장에선 제한된 선택밖에 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20년 만에 국회 전원위원회가 개막됐다. 여야 의원들 저마다 선거제 개편 소신을 밝히고 있지만 공전만 거듭한다. 선거제는 개혁 대상과 주체가 동일한, 그래서 정교한 내부 압력과 외부 협상이 필요한, 고도의 정치력이 요구되는 분야이다. 그렇다 해도 전원위는 위성정당을 만들어 스스로 망친 정치를 되살리겠다고 여야가 합의한 무대 아닌가. 그런데도 다시 선거제 개혁 제1 원칙이나 다름없는 비례대표제를 없애자고 하고, 국회 불신 여론에 기대 의원정수를 축소해야 한다는 주장이 공개적으로 나온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가 그리 힘든 일이라면 차라리 외부에 칼을 쥐여주는 편이 낫겠다 싶다. 사회 곳곳에 얽혀 있는 수많은 전선은 저마다 이해관계에 따라 우선순위가 갈린다. 내게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전선을 제쳐두고 사회 전체가 유일하게 합의한 것이, 주권자의 뜻을 대표하는 권력을 만드는 문제다. 전원위 단상에 서기 전 민심을 온전히 반영하는 선거제가 왜 중요한지 제발 한 번 더 생각하길 바란다.
전북에 사는 한 지인이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선거가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사진 속 전주의 봄은 처연했다. 거대 양당에 대한 지독한 사랑을 담은 현수막이 거리를 점령했다. ‘민주당 고맙습니다’, ‘진보당은 간첩당 아닙니까’. 참말이지, 정치는 짧고 사랑은 길다. 아무래도 강 의원과 진보당의 ‘피가 도는 한순간’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다.
구혜영 논설위원 kooh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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