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자왕’ 성신제씨 별세...자영업자들에 실패담 들려주며 위로 전해
1980년대 한국에 ‘피자헛’을 들여와 외식 문화를 바꾼 성신제(75)씨가 지난 2일 별세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고인은 한때 개인종합소득세만 110억원을 납부해 전국 1위에 올랐던 외식업계 거물로 ‘피자왕(王)’이라 불렸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벌이는 사업마다 실패를 거듭했고, 20차례 넘게 암 수술을 받는 등 불운이 겹쳤다. 말년에는 실패담을 나누는 ‘실패의 아이콘’으로 대중에게 공감을 얻었다.
성씨는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고,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호남정유 사장 비서실, 무역회사인 삼화 등에서 일했는데 30대 초반에 부장을 달았을 정도로 승진이 빨랐다. 그러던 중 다니던 회사가 부도 나는 바람에 퇴직금 7만2000원을 종잣돈 삼아 사업을 시작했다. 1983년 글로벌 피자 브랜드인 피자헛의 한국 총판권을 따내 2년 뒤인 1985년 이태원에 1호점을 열었다. 이후 직영 점포를 52개까지 늘리며 외식 업계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당시 가족들이 함께 나가 식사할 수 있는 공간이 마땅치 않았는데, 업계에선 이때부터 우리나라의 가족 외식 문화가 활성화된 것으로 본다. 1994년 소득세로 110억원을 납부해 전국 1위를 기록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성씨는 한때 피자헛 본사인 ‘펩시코’와의 경영권 분쟁으로 고비를 맞았지만, 1998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성신제 피자’를 창업해 재기를 꾀했다. 녹차가 들어간 도우, 김치·불고기 토핑 등 한국적 요소를 가미한 피자를 선보여 전국에 30개가 넘는 지점을 내는 등 승승장구했다. 이 밖에 미국 가수 케니 로저스와 협업한 치킨 전문점 ‘케니 로저스 로스터스’ 같은 외식 브랜드들을 잇따라 론칭해 프랜차이즈 업계 대부로도 불렸다. 요즘으로 치면 ‘원조 백종원’인 셈이다. 하지만 1997년 IMF 외환 위기와 2007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거치면서 도산과 파산 등 총 9번의 실패를 경험했고, 한때 임금 체불과 상표권 분쟁 같은 법적 논란이 일기도 했다. 2011년부터 폐암·위암·대장암·간암·췌장암 등을 앓아 20차례 가까이 수술을 받는 등 건강상의 불운도 겹쳤다.
벌이는 사업마다 실패했고 병원 입·퇴원도 반복했지만, 그때마다 새로운 아이디어로 재기를 시도해 ‘9전10기’ ‘오뚝이’ 같은 수식어가 그를 따라다녔다. 성씨는 생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2013년 크게 망한 뒤 한동안 나가지 않던 동창 모임에 참석했는데 수중에 1000원짜리 한 장밖에 없었다”며 “고통스러웠지만 ‘앞으로 내 인생에 봄날이 올 거다’ 이런 생각을 하며 한겨울에 백팩을 둘러메고 집까지 걸어갔다”고 했다. 나이 칠십이 넘어서도 서울 개포동 골목 안에 마련한 5평짜리 가게에서 마카롱·당근케이크를 만들어 판매했고, 한식 관련 온라인 비즈니스를 구상하는 등 막판까지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2017년 한 지상파 다큐멘터리에서 성씨의 ‘오뚝이 인생’을 조명한 뒤 창업 관련 조언을 얻으려는 젊은이들이 종종 그의 가게를 찾았다고 한다. 그즈음 불기 시작한 제2의 벤처붐과 맞물려 성공뿐만 아니라 ‘어떻게 잘 실패하느냐’가 사회의 화두가 되면서 사람들이 그의 목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성씨는 2019년 5월 “기성세대로서 청년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건네고 싶다”며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500만원을 모금, ‘괜찮아요’라는 책을 출간했다. “꿈은 크게 꾸되(dream big), 처음엔 작게 시작하고(start small), 천천히 나아가라(walk slow)”는 게 그가 청년들을 만날 때마다 늘 강조한 얘기였다.
성씨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 8월에는 행정안전부로부터 ‘실패박람회 홍보대사’로 위촉됐다. 자신의 창업 이야기와 실패담을 대중에게 나누며 예비 창업자와 자영업자들 사이에서 ‘실패의 아이콘’으로 통했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으로 자영업자들이 줄폐업할 땐 “너무 성급하고 섣불리 조바심내지 않기를 바란다”며 ‘당신의 계절은 온다’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가 청년과 예비 창업주들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전한 마지막 메시지는 이랬다. “코스모스는 가을에 피는 꽃이니 화창한 봄날에 활짝 피어 있는 개나리 보고 질투할 필요는 없다. 곧 당신의 계절이 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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