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누가 이 비를 멈추게 할 것인가
교육을 통해 누구나 팔자를 고치고 계층 상승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주로 1960년대 이후 인구가 급격히 팽창하고 경제성장이 그 뒤를 받쳐주던 시대의 산물이다. 당시에는 경제성장이 창출하던 일자리를 채워줄 풍부한 인구가 공급되었고, 학교는 졸업자들을 좋은 일자리에 배치하는 심판 노릇을 했다. “소 팔아서 대학 보낸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지만, 교육에 대한 사적 투자는 그들 모두가 승자가 될 수 있는 공평한 게임으로 보였다.
하지만 최근 상황은 반전되고 있다. 인구는 줄고, 경제성장은 둔화되며, 질 좋은 일자리는 쉽게 늘지 않는다. 경제성장률이 높을 때는 노동 소득이 자본 소득보다 높을 수 있고, 이때는 교육-취업-계층상승의 사다리가 열릴 수 있지만, 경제성장률이 낮아지고 노동 소득이 자본 소득을 넘어서지 못하는 상황에서라면 교육사다리의 수익률은 결코 예전 같지 않게 된다. 게다가 삼성전자 등 일부 글로벌 기업들이 국내총생산(GDP)의 80% 이상을 차지하면서도 고용은 10%에 머무는 경제구조가 일상화되면서 소수의 억대 연봉자와 다수의 최저임금 근로자가 갈리는 양상이 나타난다.
이제 교육경쟁의 평균 수익률은 고점을 찍고 내리막으로 향하고 있다. 오직 교육사다리의 상위 20%만이 그나마 이 게임의 수익을 누리는 형편이 되었다. 웬만큼의 사교육비를 들여서는 예전 같은 교육투자 수익을 얻기는 어려우며, 부모세대가 경험했던 활황기 교육시장만을 생각하면서 아이들을 무조건 과잉경쟁으로 몰아넣는 것은 시대착오가 되었다. 돌아보건대, 결코 모두가 승자로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오히려 과잉교육경쟁의 패자들일 뿐이다.
하지만 상황이 이럴수록 교육의 과잉경쟁은 ‘미친 게임’이 되어간다. 한계수익률이 떨어질수록 교육경쟁에서 빈부의 차이가 결과에 더욱 확연히 영향을 미치며, 부의 분포가 곧 교육기회 수혜의 분포가 된다. 경쟁이 심해지면 질수록 게임을 더욱 공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비정상의 정상화 현상이 일상화된다. 수능 중심의 정시전형이 늘어나고, 입시관련 서류를 위조하며, 온갖 스펙을 만드는 일이 난무한다. 공정하게 평가하기 어려운 내용과 능력은 교육과정에서 지워진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핵심은 교육경쟁이 가져다주는 수익의 원천이 성적을 만들어내는, 상대적으로 양화된 서열 우위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교육내용과 상관없이 단지 평가에 의한 서열에 의해 발생하는 이익이다. 교과내용은 서열 생산을 용이하게 하는 지식들, 즉 정답과 오답이 분명한 것들로 선별된 것들이다.
이런 현상이 상시화되면서 한국 교육은 서열화 평가의 포로가 되었다. 평가가 교육을 이끄는 본말전도 현상, 다시 말해서 평가라는 꼬리가 교육이라는 몸통을 흔드는(wag the dog) 현상이 교육 전체를 장악하게 된 것이다. 과잉경쟁 상황 속에서 평가의 공정성을 유지하려고 하니 결국 정답 맞히기 학습이 무한 반복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부모들의 지나친 자식 사랑이 엔진에 기름을 공급하듯 이 메커니즘을 영속화시킨다.
한편, 이 게임의 여파는 상대적으로 심각하다. 가장 우려스러운 점은 그렇게 열공수련(?)을 하면서 학습한 지식이 의외로 학생들의 인격과 자존심을 파먹고 있었다는 것이다. 서열 우위라는 허상은 늘 타자준거적으로 자신을 비교 대상으로 삼도록 만들었다. 모든 학습은 타자, 즉 평가자의 시각에서 수행되며, 자기준거적인 삶과 주체성은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서열이 낮아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늘 자신을 차갑게 평가하는 시각을 의식하며 자신을 감시하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다. 한번도 자신을 따뜻하게 보듬는 내면의 나의 모습이 수면 위로 올라와 크게 숨 쉬게 해 주는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다.
서열 우위를 점하기 위한 학습은 단지 정답을 찾는 기술이며, 정답이란 서열화 게임을 위해 고안된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미래사회에서 정답은 불필요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창의성은 정답 너머에 있는 무엇인가를 찾는 능력이며, 정답은 과거의 지식을 모방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서울대 김세직 교수는 <모방과 창조>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그는 한국 경제가 모방 중심 경제에서 창조 중심 경제로 변해야 하는 것처럼, 한국 교육도 모방에서 창조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혹은 한국 교육이 모방 중심적이기 때문에 한국 경제도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듯하다. 미국의 록밴드 시시알(CCR)이 노래했듯이, 누가 이 비를 멈추게 할 것인가?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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