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전역에 ‘펜타닐 해독제’ 자판기… 2024 대선 쟁점된 마약[글로벌 현장을 가다]

문병기 워싱턴 특파원 2023. 4. 13.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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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현지 시간) 미국 수도 워싱턴시 소방서에 설치된 펜타닐 해독제 자판기. 워싱턴시는 급성 펜타닐 중독으로 인한 사망자가 급증하자 이달 6곳에 펜타닐 해독제와 약품이나 식품에 펜타닐이 들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테스트키트 등을 무료로 받을 수 있는 자판기를 설치했다. 워싱턴=문병기 특파원 weappon@donga.com
문병기 워싱턴 특파원
6일(현지 시간) 미국 수도 워싱턴의 야구장 내셔널스 파크(Nationals Park) 인근 소방서 앞. 콜라 등 음료를 판매하는 자판기 옆에 새로운 자판기가 설치됐다. 외형은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느 자판기와 다를 바 없지만 상단에 “만약 과다복용하고 있다면 지금 멈추고, 911로 전화하세요”라는 문구가 빨간색, 노란색 경고 표지판 속에 큼직하게 쓰여 있었다. 자판기 안에는 음료나 스낵 대신 펜타닐 등 마약 해독제와 음식이나 약품에 펜타닐이 들어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펜타닐 테스트 스트립이 들어 있었다. 이른바 ‘펜타닐 해독제’ 자판기다.

워싱턴시는 이달 10일부터 6곳에 무료 자판기를 설치해 마약 응급키트를 제공할 계획이다. 급성 펜타닐 중독자 등이 자판기에 표시된 번호로 전화를 걸어 상담사의 지시에 따라 스스로 치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워싱턴시가 마약 응급처치 키트 자판기를 설치하기로 한 것은 펜타닐 중독자가 급증하고 있어서다. 워싱턴시에 따르면 지난해 마약 중독으로 인한 사망자는 448명으로 2018년 213명보다 2배 이상으로 늘었다. 이들 중 96%는 펜타닐 중독으로 인한 사망자였다. 바버라 바즈론 워싱턴시 건강국장은 4일 자판기 설치 행사에서 “마약 중독으로 인한 사망자가 너무 많다”며 “해독제와 펜타닐 테스트 스트립을 통해 마약 피해를 줄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공공장소에 ‘응급 처치’ 자판기

펜타닐 중독자가 급증하면서 사회적 문제가 확산되자 최근 미국 주요 도시는 잇따라 마약 중독 응급처치 자판기를 설치하고 있다. 펜타닐 등 아편류 마약 해독제인 ‘날록손’ 등을 처방 없이 공급받을 수 있는 장치다. 날록손은 당초 암 환자 치료를 위해 개발된 펜타닐 등 마약성 진통제의 효과를 일시적으로 차단하는 약물이다.

펜타닐 중독자들이 대거 모여들어 이른바 ‘좀비 랜드’로 불리는 켄싱턴 거리가 있는 펜실베이니아주(州) 필라델피아는 지난해 마약 응급처치 자판기를 설치했고, 최근에는 미국 전역으로 자판기 보급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 자판기는 범죄율이 높은 지역의 보건소나 소방서에 우선적으로 설치되고 있지만 최근엔 청년층이 자주 찾는 공공도서관과 대학 등으로도 확산되고 있다. 미국 워싱턴주 타코마시는 올 2월 공공도서관인 무어 도서관에 펜타닐 해독제를 무료로 제공하는 자판기를 설치했다. 이 도서관은 직원들에게 응급 중독자를 즉석에서 치료할 수 있도록 해독제 투여 등 응급처치 방법을 교육하기도 했다. 로스앤젤레스와 필라델피아, 덴버, 밀워키 등도 지난해부터 공공도서관에 마약 해독제 자판기를 설치하고 있다.

일각에선 공공장소에 마약 응급처치 자판기를 설치하는 것에 대한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자판기를 이용하는 것만으로 마약 중독자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게 되는 데다 또 다른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신시내티대 대니얼 아렌트 박사는 지난해 11월 미국 약사협회에 발표한 논문에서 “자판기가 설치된 도시의 마약 중독 사망자 통계를 분석한 결과 자판기가 설치되지 않은 인근 도시보다 사망자가 10% 이상 줄었다”고 밝혔다. 이어 “(마약 응급처치) 자판기 사용이 ‘낙인찍기’의 대상이 돼선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캔디-젤리형 마약에 10대 사망

지난해 10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시에서 적발된 펜타닐 캔디. 로스앤젤레스카운티 보안관실 제공
각급 학교에 직접 마약 해독제를 공급하는 지역도 늘고 있다. 중고교에서 펜타닐 복용으로 인한 사망 사고가 잇따르는 등 펜타닐 공포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 교육 전문지가 미국 전역의 교장과 교육청 간부 105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40% 이상이 마약 해독제를 학교에 비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로스앤젤레스시 교육청은 지난해 10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모든 학교에 마약 해독제를 공급한다고 밝혔다.

로스앤젤레스에선 15세 여학생이 펜타닐로 코팅된 알약을 일반적인 진통제인 줄 알고 먹었다가 숨지는 사건이 일어나 논란이 일었다. 이에 앞서 캘리포니아 남부 노갤러스시에서도 한 고등학생이 펜타닐이 입혀진 알약을 먹었다가 숨지기도 했다.

실제로 최근 미국에선 유명 브랜드 초콜릿이나 캔디 포장지에 펜타닐을 담아 유통시키거나 젤리나 일반 진통제 등에 펜타닐을 덧씌워 판매하는 사례가 크게 늘고 있다. 지난해 4월 오하이오주에선 한 중학생이 다른 학생이 건넨 펜타닐 젤리를 먹고 급성 중독 증세를 보여 병원에 이송됐다. 최근에는 펜실베이니아주와 메릴랜드주 곳곳에서 펜타닐이 입혀진 젤리가 대거 판매돼 지역 검찰이 수사에 나선 상황이다.

펜타닐 캔디나 펜타닐 젤리 등의 유통이 늘고 있는 것은 펜타닐이 ‘악마의 마약’으로 불릴 정도로 극히 소량으로도 극심한 중독 증세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마약단속국(DEA)은 지난해 10월 핼러윈을 앞두고 사탕처럼 보이게 제작된 ‘무지개 펜타닐 알약’이 유통되고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실제로 지난달 텍사스주 댈러스 인근 플레이노시에선 진통제와 똑같은 모양의 펜타닐 알약이 퍼지면서 최근 6개월간 중고생 3명이 잇따라 사망하기도 했다.

“편의점, 주유소서 해독제 판매”

펜타닐이 10대들로까지 확산되면서 과다복용 등으로 인한 사망자도 크게 늘고 있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불법 마약 중독 사망자 통계에 따르면 2021년 15∼24세 사망자는 7426명이다. 이 가운데 펜타닐 등 아편계 합성 마약으로 인한 사망자는 5936명으로 80%에 육박했다. 특히 펜타닐로 인한 15∼24세 사망자는 2015년에 비해 6배가량 늘었다.

펜타닐로 인한 어린이 사망 사고도 잇따르고 있다. 지난해 펜타닐로 인한 3세 미만 영유아 사망자는 133명으로 2020년 67명의 2배로 급증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2021년 12월 워싱턴주에선 17개월 영아가 부모가 펜타닐을 흡입하고 잠든 사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해 부모가 살인죄로 기소되기도 했다. 지금까지 미국에서 기록된 최연소 펜타닐 사망자다.

미국 정부와 의회는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른 펜타닐 대응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미 식품의약국(FDA)은 지난달 29일 펜타닐 해독제인 날록손 스프레이를 비처방용 의약품으로 지정했다. 약국과 편의점, 주유소 등에서 처방 없이도 해독제를 구입할 수 있도록 한 것. 백악관은 이달 4일엔 펜타닐의 위험성과 해독제 사용법을 알리는 전국적인 캠페인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펜타닐 유통 확산을 막기 위한 처벌과 함께 외교적 압박도 강화하고 있다. 미국과 멕시코가 중국에서 생산되는 펜타닐 원료가 멕시코 마약 카르텔을 통해 미국으로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대책 마련을 논의하고 있는 가운데 백악관은 11일 마약 밀매 조직들에 대한 금융 제재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펜타닐은 미국 내부의 문제”라며 외교적 협조 요청을 일축하고 있는 중국을 겨냥한 조치로 풀이된다.

2024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야당인 공화당이 바이든 행정부의 느슨한 국경 정책이 원인이라고 공세에 나서면서 펜타닐 대응 문제는 주요 정치 쟁점으로도 부상하고 있다.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10일 대선에 출마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측근들에게 재선에 성공하면 멕시코 카르텔을 겨냥해 미군 특수부대를 파견하는 펜타닐과의 전쟁 계획을 논의했다고 보도했다.

문병기 워싱턴 특파원 weapp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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