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한국인의 ‘정치과잉’
4월10일 아침, 유력 일간지에서 놀라운 1면 톱기사를 봤다. ‘정부 심판 vs 거야 심판, 집권 2년 중간평가 총선’이라는 제목이다. ‘4·10 총선 1년 앞으로’라는 부제가 보였다. 참 대단하다. 1년 남은 총선 기사가 1면 톱에 오를 나라는 아마도 한국뿐일 거다. 나도 역사학 분야 중에서 정치사를 전공하고 있고, 정치기사도 탐독하는 편이지만 이 기사에는 놀라고 말았다. 정말 한국인들은 선거 하고 싶어서 2000년 동안 어떻게 참고 지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인의 ‘정치과잉’이 새삼스러운 얘기는 아니다. 술자리 등 사석에서 정치얘기는 고정메뉴다. 최근 들어 진영논리가 강화되는 바람에 “거, 정치얘기는 하지 맙시다” 하며 서로 눈치 보는 분위기가 생겼지만, 같은 진영끼리 모이는 자리에서는 여지없다.
해당 기사를 보고 놀란 맘을 달래고 있던 차에 페친 박재항님의 포스팅을 보고 말았다. 그분이 자주 들르는 목욕탕에서 어느 날 60대 중반 남성이 혼잣말로 계속 정치 욕을 하더란다. 그다음에 갔을 때도 또 그러길래 보다 못한 70세 정도의 이발사 분이 먹을 거를 주며 조용히 타일렀더란다. 그랬더니 이 욕쟁이 양반이 “잘 먹고 음료도 잘 마셨어요. 이제는 안 그럴게요. 미안하구먼요”라며 사죄의 뜻으로 자기가 먹은 그릇 설거지를 하더라는 얘기. 훈훈하게 마무리돼 다행이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어딘지 일종의 격렬함이 있는데, 그 격렬함에는 또 코믹한 구석이 있다”고 한 일본의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의 지적이 떠올랐다(<한나라기행>).
그러고 보니 승객이 가득한 지하철에서 “예수 믿으세요~~” 말고도, 큰 목소리로 정치 비판을 하는 분들을 본 적이 있다. 시장통 상인들이 신문을 덮고 한숨을 내쉬며 “나라가 걱정이여…”하던 장면도 기억난다. 한국인은 외로움도, 무료함도, 부족한 술자리 안주도 정치로 때우는 듯하다. ‘한국 사람은 한 명 한 명이 정치평론가’라는 말도 있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미디어의 ‘정치과잉 보도’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신문이나 방송들은 정치뉴스라면 뉴스가치를 제대로 따지지 않고 과도하게 보도한다. 외국 같으면 주간지 가십에나 나올 법한 뉴스도 유력 일간지들조차 열심히 게재한다. 전 대선 유력 주자가 장인상 때문에 귀국한 일도 ‘친이낙연계 결집 신호탄 되나’라며 뭐 대단한 의미가 있는 양 취급해준다. 전직 소방관 출신 야당 초선의원이 다음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한 것도 불출마 ‘선언’이라고 제목을 뽑는다. ‘정계은퇴 선언’이라고 안 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경제계에서는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의 신경영 발표 정도나 돼야 겨우 ‘선언’ 대접을 받는다(프랑크프루트 선언).
몇 해 전 장례식장에서의 일이다. 문상객들이 열띤 정치토론을 하고 있는 와중에, 한 중견정치인이 멀리서 나타나자 모두 그를 바라보느라 토론이 멎었다. 살펴보니 우리 테이블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 정치인은 테이블을 돌며 악수를 청했고, 방금 전까지 그 당을 욕하던 사람들도 모두 공손히 손을 맞잡았다. 신문방송에서 자주 보던 사람이니 막상 눈앞에 나타나면 ‘아우라’가 다른 것이다. 우리 언론들이 이런 정치인들의 ‘광채’를 만들어주었고, 그 맛이 사람들이 기어이 정치를 하려고 하는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나는 일본생활을 오래했지만 이 같은 모습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그래서인지 구한말 한국을 찾은 일본인들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정치과잉’을 신기해하는 사람들이 일본에는 많다. 식민지기에는 ‘다른 건 몰라도 정치는 조선인이 한 수 위’라고 한 일본인도 있었고(김동명 <지배와 저항 그리고 협력>), 시바 료타로도 위의 책에서 한국인의 ‘정치애호’에 대해 거듭 언급한다. 내년 초쯤에는 ‘총선 100일 카운트다운’이 일제히 시작될 것이다. 이렇게나 좋아해주는데 정치도 이제 보답 좀 하자.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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