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리하라의 사이언스 인사이드] 더 이상 술취한 원숭이로 남을 수는 없다

기자 2023. 4. 1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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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술을 찾는다. 기분이 좋아서 혹은 기분이 나빠서, 별일이 있어서 혹은 아무 일도 없어서라며 술잔을 기울인다. 예부터 술은 경사와 애사, 길사와 흉사에 모두 빠지지 않았으며, 희로애락의 순간에 함께하곤 했다. 인류가 언제부터 술을 빚어 마시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꽤나 오래전의 일임은 확실하다. 이란과 중국의 유적지에서는 술의 성분이 남아 있는 7000년 전의 항아리 파편이 발견되기도 했고, 더운 지방에서도 당분이 풍부한 야자나무의 수액을 발효시킨 알코올 음료를 5000년 넘게 마셔왔다는 증거가 남아 있다. 또한 고대 피라미드 건설 노동자들이 맥주를 노동주 삼아 마셨다는 파피루스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술을 마시는 행위는 많은 문화권에서 줄잡아 수천년간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미국의 생물학자 로버트 더들리 교수는 인류의 음주 역사는 이보다 훨씬 길어, 어쩌면 인류의 역사보다 오래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일명 ‘술 취한 원숭이 가설(drunken Monkey Hypothesis)’이다.

이은희 과학저술가

애초에 술의 정체성을 담당하는 알코올은 미생물의 일종인 효모가 당분을 분해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내는 파생물이다. 효모는 가장 흔한 미생물 중 하나이므로, 이론적으로는 자연계에서 당분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는 효모가 자랄 수 있고 모두 알코올 발효가 일어나 술이 만들어질 수 있다.

특히 잘 익은 과실은 자연이 빚어내는 술에 가장 적합한 재료다. 푹 익은 과일은 가만히 놓아두기만 해도 효모에 의해 발효되며 자연스럽게 알코올이 만들어진다. 알코올은 휘발성이 강한 데다 향기 성분들을 녹이는 유기용매이므로 곧 그 특유의 향취가 공기 중으로 퍼져나간다. 발효된 과실에서 나는 독특한 향은 주로 과일을 먹고 사는 존재들에게는 더없이 달콤한 유혹이 된다.

알코올 냄새가 난다는 건 그만큼 과일이 농익었다는 뜻이기에, 알코올 냄새를 감지하는 능력이란 곧 당분이 듬뿍 든 열량 높은 먹거리를 찾을 수 있는 능력이다. 지금도 침팬지나 보노보 등 영장류들이 하루 필요 열량의 절반 이상을 과실에서 얻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인류의 조상에게도 과일은 주된 열량 공급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알코올의 향을 감지하는 능력은 빽빽한 나뭇잎 뒤에 숨어 눈에 잘 띄지 않는 과실의 존재도 눈치챌 수 있도록 하는 유리한 감각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알코올 발효가 일어난 과일을 먹은 뒤 느껴지는 약간의 취기는 이 행위에 대한 보상이 되었을 것이다. 이에 더들리 교수는 인류의 조상에게 ‘술을 마시는 즐거움은 열량 높은 먹거리의 섭식을 촉진하기 위한 선택 진화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즉 숲이 우거진 우림에서 잘 익은 과일을 찾아 헤매던 진화적 형질이, 지금 우리가 술에 대해 거의 본능적인 이끌림을 느끼는 이유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가설이지만, 인간의 알코올 분해 능력이 여타 동물들에 비해 뛰어나다는 사실은 종종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쓰이곤 한다.

세균을 죽이는 손소독제의 주성분이 알코올임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알코올은 생체에 유해한 물질이다. 따라서 체내에서 알코올은 먼저 알코올 탈수소효소(ADH)로 인해 아세트알데히드로 변환되고, 다시 아세트알데히드 탈수소효소(ALDH)에 의해 세포 내에서 열량원으로 이용할 수 있는 아세트산으로 바뀐다. 이때 ADH와 ALDH의 활성은 유전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데, 인간은 알코올 분해 효소들의 활성이 다른 동물들보다 상대적으로 뛰어나다. 그만큼 알코올의 독성에 어느 정도 저항성을 가지기에 소량의 알코올을 섭취함으로써 잃는 것보다 잘 익은 과실에서 얻는 열량적 보상이 더 커서 이를 탐닉하도록 진화했다는 것이다.

더들리 교수는 저서 <술 취한 원숭이>를 통해 인류는 술에 대한 선호를 가진 채 진화했음을 소개한다. 그리고 강하게 통탄한다. 한때 열량 섭식의 이득으로 인해 선택 진화된 알코올에 대한 선호도가, 이후 유전자가 예기치 못한 거의 무제한적인 알코올 공급 가능 환경과 맞물리자 문제가 되었다고. 먼 옛날 유용한 음식물을 섭취하는 데 사용되었던 신경 회로의 보상 신호가 환경의 변화에 의해 과도하게 증폭되며, 그로부터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며칠 전, 또 어린 생명이 술을 마시고 운전대를 잡은 나이 든 이의 어리석은 선택에 의해 억울하게 스러졌다. 인류는 술을 마실 수 있도록 진화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술을 마시고 하는 행동의 정당성을 보장할 수는 없다. 그 행동의 결과가 타인의 안녕과 안전에 해를 끼칠 때는 더더욱 그렇다. 언제까지나 ‘술 취한 원숭이’로 살아갈 순 없지 않은가.

이은희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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