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서정보]“욕심과 분노는 아지랑이…” 직지 50년만의 외출
서정보 논설위원 2023. 4. 12.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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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가 곧 깨달음이요/무심(無心)하면 곧 경계가 없다/생사와 열반이 다르지 않고/욕심과 분노는 아지랑이나 그림자 같다.' 12일부터 프랑스국립도서관이 '직지(直指)'를 공개하면서 펼쳐놓은 페이지에 담긴 내용이다.
조선에서도 태종이 금속활자를 만드는 주자소를 세웠고, 세종 때인 1434년에는 활자의 백미로 꼽히는 갑인자를 20만 개나 만들 정도였다.
하지만 유럽과 지리적 역사적 여건이 달랐던 만큼 이런 식의 비교 평가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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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가 곧 깨달음이요/무심(無心)하면 곧 경계가 없다/생사와 열반이 다르지 않고/욕심과 분노는 아지랑이나 그림자 같다.’ 12일부터 프랑스국립도서관이 ‘직지(直指)’를 공개하면서 펼쳐놓은 페이지에 담긴 내용이다. 직지의 편찬자인 백운 스님이 전하고 싶었던 선불교의 정수, 즉 선과 악이나 삶과 죽음 등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불이(不二)’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50년 만의 외출, 글이 살아 숨쉬는 듯하다.
▷직지는 고려 말인 1377년 간행됐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이다. 독일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본 성경이 1455년에 처음 인쇄된 것에 비하면 78년 앞선다. 무신정권 시대인 1234년 상정고금예문이 금속활자로 만들어졌다는 기록도 있으니 서양보다 200년 이상 앞섰을 수도 있다. 조선에서도 태종이 금속활자를 만드는 주자소를 세웠고, 세종 때인 1434년에는 활자의 백미로 꼽히는 갑인자를 20만 개나 만들 정도였다.
▷고려∼조선이 화려한 인쇄 기술을 가졌지만 사회의 혁명적 변화를 이끌어내진 못했다는 일부 시각이 있다. 유럽에서 구텐베르크를 높이 평가하는 건 중세의 질곡에서 벗어나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등 근대로 가는 지식혁명을 일으켰기 때문이란 얘기다. 1997년 당시 미국의 부통령이었던 앨 고어는 독일 베를린의 주요 7개국(G7) 회담에서 “금속활자는 한국이 세계 최초로 발명하고 사용했지만, 인류 문화사에 영향을 미친 것은 독일의 금속활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럽과 지리적 역사적 여건이 달랐던 만큼 이런 식의 비교 평가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동국대 황태연 명예교수는 ‘책의 나라, 조선의 출판혁명’이란 책에서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출판된 금속활자 책이 총 1만4117종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이 책들의 90%가 농업, 양잠, 어업, 의학 등 실용서였다고 한다. 조선 후기엔 왕실부터 서당까지 매년 400만 권의 책이 필요했는데 조선의 뛰어난 출판 역량이 감당했다는 것이 황 교수의 주장이다. 이런 인쇄 문화가 ‘배워야 산다’는 ‘집단 DNA’를 심어 현재의 산업화, 민주화, K문화의 모태가 됐다는 것이다.
▷일부 해외 학자들은 한반도의 인쇄기술이 구텐베르크에게도 영향을 미쳤다는 연구를 내놓고 있다. 아직 공인된 내용은 아니지만 분명한 건 우리 민족의 인쇄 문화는 충분히 자부심을 가져도 될 수준이라는 점이다. 정작 부끄러운 건 지금이다. 성인의 절반은 책을 1년에 한 권도 읽지 않는다. 2021년 1인당 평균 독서량은 4.5권에 불과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 수준이다. 50년 만에 세상에 나온 직지 소식을 접하며 책 안 읽는 대한민국의 세태를 떠올리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
▷직지는 고려 말인 1377년 간행됐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이다. 독일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본 성경이 1455년에 처음 인쇄된 것에 비하면 78년 앞선다. 무신정권 시대인 1234년 상정고금예문이 금속활자로 만들어졌다는 기록도 있으니 서양보다 200년 이상 앞섰을 수도 있다. 조선에서도 태종이 금속활자를 만드는 주자소를 세웠고, 세종 때인 1434년에는 활자의 백미로 꼽히는 갑인자를 20만 개나 만들 정도였다.
▷고려∼조선이 화려한 인쇄 기술을 가졌지만 사회의 혁명적 변화를 이끌어내진 못했다는 일부 시각이 있다. 유럽에서 구텐베르크를 높이 평가하는 건 중세의 질곡에서 벗어나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등 근대로 가는 지식혁명을 일으켰기 때문이란 얘기다. 1997년 당시 미국의 부통령이었던 앨 고어는 독일 베를린의 주요 7개국(G7) 회담에서 “금속활자는 한국이 세계 최초로 발명하고 사용했지만, 인류 문화사에 영향을 미친 것은 독일의 금속활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럽과 지리적 역사적 여건이 달랐던 만큼 이런 식의 비교 평가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동국대 황태연 명예교수는 ‘책의 나라, 조선의 출판혁명’이란 책에서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출판된 금속활자 책이 총 1만4117종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이 책들의 90%가 농업, 양잠, 어업, 의학 등 실용서였다고 한다. 조선 후기엔 왕실부터 서당까지 매년 400만 권의 책이 필요했는데 조선의 뛰어난 출판 역량이 감당했다는 것이 황 교수의 주장이다. 이런 인쇄 문화가 ‘배워야 산다’는 ‘집단 DNA’를 심어 현재의 산업화, 민주화, K문화의 모태가 됐다는 것이다.
▷일부 해외 학자들은 한반도의 인쇄기술이 구텐베르크에게도 영향을 미쳤다는 연구를 내놓고 있다. 아직 공인된 내용은 아니지만 분명한 건 우리 민족의 인쇄 문화는 충분히 자부심을 가져도 될 수준이라는 점이다. 정작 부끄러운 건 지금이다. 성인의 절반은 책을 1년에 한 권도 읽지 않는다. 2021년 1인당 평균 독서량은 4.5권에 불과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 수준이다. 50년 만에 세상에 나온 직지 소식을 접하며 책 안 읽는 대한민국의 세태를 떠올리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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