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라면 원조국 일본이 베낀 한국 컵라면

김홍수 논설위원 2023. 4. 12.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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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일본 나가노현 아사마 산장에서 일본 극좌 적군파 일당이 산장 관리인 부부를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극을 벌였다. TV가 ‘아사마 산장 사건’을 연일 생중계했다. 중무장 특공대원들이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장면이 자주 포착됐다. 인스턴트 라면을 발명한 기업 일본 닛신(日淸)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컵누들’이었다. 비싼 가격 탓에 외면받던 컵라면이 이 사건 이후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한국의 라면기업 삼양이 1973년 일본 컵누들을 베껴 ‘컵라면’을 선보였다. 생소하고 값도 비싸 곧 퇴출당했다. 1981년 농심이 국사발 모양 ‘사발면’을 다시 선보였다. 상에 놓고 먹을 수 있는 ‘사발’ 모양이 소비자의 관심을 끌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사발면 홍보대사 역할을 톡톡히 했다. 카메라가 관중석을 비추면 외국인들이 사발면을 맛있게 먹는 장면이 클로즈업되곤 했다. 세계 각국에서 사발면 주문이 쏟아졌다.

▶한국 컵라면의 진화는 계속됐다. 팔도가 1986년 세계 최초로 사각 컵라면 ‘도시락’을 선보였다. 뜨거운 물을 부을 때 더 안전하고, 휴대도 간편했다. 부산항에 들락거리던 러시아 선원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보따리상을 거쳐 러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30년간 44억개 이상 팔리며 러시아 ‘국민 식품’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형 컵라면의 원조 격인 농심 ‘육개장 사발면’은 출시 후 41년간 52억개가 판매됐다. 지금도 한 해 2억개 이상 팔린다. 봉지면 매출은 제자리걸음이지만, 컵라면은 매년 20~30%씩 고속 성장하고 있다. 1인 가구 급증과 편의점에서 간단히 한 끼 때우는 10~20대들의 컵라면 사랑 덕이다. 예전엔 봉지면이 먼저 나오고 컵라면이 나중에 출시됐지만 요즘엔 순서가 바뀌어 컵라면을 먼저 출시하는 추세다.

▶2012년 출시된 삼양 ‘불닭볶음면’은 외국인들이 한국의 매운 라면에 도전하는 ‘파이어 누들 챌린지’를 세계적 문화 이벤트로 만들었다. 관련 유튜브 영상만 100만개 이상 제작됐다. 불닭볶음면은 짜파구리(짜파게티+너구리)같이 소비자들이 기존 제품을 변형해 세상에 없는 제품을 만드는 ‘모디슈머(modify+consumer)’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치즈·짜장·커리·김치·야키소바 불닭볶음면 시리즈로 이어지며 40억개 이상 판매됐다. 라면 원조 일본 닛신이 한국 불닭볶음면을 베낀 ‘야키소바 볶음면’을 내놨다. 포장지에 한글로 ‘볶음면’이라 쓰고, ‘고추장과 치즈의 감칠맛’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K라면의 끊임없는 혁신이 일구어낸 역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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