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간 경쟁 아닌 생태계 간 경쟁”…‘K반도체·배터리’가 마주한 최대 위협 [신냉전의 덫]
[헤럴드경제=김지윤·김민지 기자] “반도체 산업은 특이하게도 어떤 한 축이 무너지게 되면 기술이 더 앞으로 진보하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반도체는 ‘기업과 기업 간 경쟁’이 아니라 ‘생태계와 생태계 간 경쟁’으로 봐야 합니다.”(‘2023 용인 반도체 컨퍼런스’, 박진수 삼성전자 DS상생협력센터 상무)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산업의 경쟁 구도를 송두리째 바꿨다. 기업끼리의 경쟁이 생태계 전반의 대결로 확전되며 곳곳에 블록화 싸움이 펼쳐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두 나라가 공급망을 쥐고 흔드는 탓에 한국의 핵심 산업인 반도체와 배터리가 직격탄을 맞았다. 이른바 미·중 갈등에 따른 ‘신(新)냉전의 덫’에 K반도체·배터리가 꽉 걸린 격이다. 특히 이들 산업은 미국과의 우호적 관계 유지가 중요한 동시에, 수출과 자원 수급 측면에서는 중국 의존도가 높아 신냉전 자체가 최대 위협이 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미·중 자국 중심주의에 ‘K반도체 왕국’ 흔들=오랜 기간 독주체제를 유지해온 ‘K반도체’는 미국을 필두로 한 자국 중심주의로 인해 최대 난관에 봉착했다. AI, 자율주행 기술이 발전하며 반도체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커져 더 큰 기회가 생겼지만, 반대로 ‘반도체가 곧 안보’라는 기조가 전면에 떠오르면서 더욱 강대국 영향권에 놓였기 때문이다.
현재 전세계 반도체 생산량의 70%가 동아시아에서 나온다. 한국과 대만이 압도적이다. 미국과 유럽은 각각 20%, 10%에 불과하다. 이에 그간 반도체 공급의 주도권을 쥐지 못하던 주요국들이 공급망 재편을 위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칩스법(반도체 지원법)이 대표적이다. 미국은 수십조원의 보조금을 앞세워 글로벌 기업들의 자국 내 반도체 공장 유치를 장려하고 있다. 현재 삼성전자와 TSMC가 미국 내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 중이다.
그러나 쉽사리 보조금 지원 신청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대중 수출 규제, 생산 능력 제한, 민감한 기술자료 및 현금흐름 정보 제출 등이 보조금 수령 조건으로 붙었기 때문이다.
중국에 공장을 두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겐 청천벽력이다. 삼성전자는 낸드플래시의 약 40%를, SK하이닉스는 D램의 50% 가량을 중국에서 생산한다. 미국은 지난해 10월 중국에 대한 첨단 반도체 장비 수출 규제를 결정했다. 삼성과 SK는 1년 유예를 받아 한숨 돌렸지만, 만약 연장을 받지 못하면 메모리 반도체 생산 핵심 거점에 차질이 불가피하다.
국가적 차원에서도 딜레마다. 한국 반도체 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40%에 육박한다. 최근 대중 수출 규모가 크게 줄었지만 여전히 중국 수출의 26.1%(2월 기준)를 반도체가 차지한다. 한국 반도체가 미국과 중국 앞에 수비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반도체 공급에서 기업 간 협력에는 국경이 없었지만, 지금은 반도체를 놓고 전세계에서 투자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며 “약 20년 간 경쟁자가 없어 우위를 유지해온 우리나라에게는 반도체 공급망 자국화 흐름이 큰 위협이다”고 지적했다.
결국 자국 내 생태계 강화가 핵심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불안정한 국제 정세에 휘둘리지 않도록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 설계(팹리스), 파운드리 등 종합적인 역량을 갖춰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이런 차원에서 삼성전자가 20년간 용인에 300조원을 투자해 세계 최대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는 방안이 한국이 대응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평가된다.
▶중국 의존도 80% 넘는 배터리…광물 수입국 다변화 관건=미·중 간 상호 견제 심화는 국내 배터리 업체에게도 큰 타격이다. 미국이 배터리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기 위해 자국 내 생산 시설 확대, 신 공급망 구축 등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나서면서다.
지난달 말 공개된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세부 지침은 배터리 생산을 위한 광물 확보부터, 핵심 부품, 최종 전기차 조립까지 생태계 전반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중국 등 우려대상기관이 제조한 배터리 부품은 2024년부터, 이들이 추출·가공한 배터리 광물은 2025년부터 전기차 보조금 대상에서 제외된다.
이에 중국 역시 최근 광물 수출을 제한하겠다는 맞불 작전을 내놨다. 전기차 모터에 들어가는 희토류 자석을 수출 금지 대상에 올린 것이다. 당장은 규제 품목이 제한적이지만, 향후 배터리 공급망 전반으로 확장할 수 있는 만큼 업계는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한국은 중국과 배터리 산업에서 경쟁 관계인 동시에 깊은 협력 관계를 맺고 있어 상황이 더 복잡하다. 한국의 배터리 광물 공급망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막강하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배터리 핵심 소재인 수산화리튬(산화리튬 포함) 수입액 중 중국의 비중은 87.9%를 차지했다. 또 다른 핵심 광물인 코발트(산화코발트·수산화코발트)는 중국 수입액 비중이 72.8%에 달했다.
국내 배터리 기업들은 호주, 아르헨티나, 인도네시아 등으로 공급망 다변화를 추진하고, 호주 광산에서 리튬 생산에 나서는 등 대책을 찾고 있지만, 당장 IRA 기준에 맞추는 것은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장기적으로 중국이 광물 공급망 전체를 통제할 경우 광물 가격이 급등해 배터리 업체들의 수익성이 악화할 수도 있다. 중국은 코발트 정제능력에서 77%에 달하는 세계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희토류의 경우 중국의 정제·가공 역량 비중은 87%에 육박한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과 중국 간 대립 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지나치게 높은 중국 의존도는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며 “공급망 다변화는 장기적인 추진 과제로, 배터리 소재 연구개발 및 광물 채굴·가공 등에 있어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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