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기록하면 성장한다는 게 25년 연구 깨달음이죠”
김익한 명지대 명예교수는 국내 1호 기록학자다. 1980년대 젊은 시절, 역사학과 실천 사이에서 방황하며 고민하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인생의 방향을 ‘기록학’에서 찾았다. 25년 동안 명지대 교수로 재직하며 기록에 매진해 현 국가기록관리 제도의 틀을 짰다.
1998년 한국국가기록연구원을 만들고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과 힘을 합쳐 2000년 기록관리법 시행을 이끌었다. 같은 해 국내 최초 기록학 전문대학원인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설립을 주도했다. 참여연대 정보공개사업단장, 대통령비서실 기록 혁신 태스크포스(TF)의 자문위원장, 서울기록원 설립추진단장 등을 맡았다.
기록연구사로 키워 낸 제자만 300명이 넘는 그는 작년 8월 명지대를 그만두고 ‘문화제작소 가능성들’ 대표이사가 됐다. 현재 구독자 25만 명의 유튜브 채널 ‘김교수의 세 가지’와 온라인 교육 프로그램인 ‘아이캔유튜브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달 출간한 <거인의 노트>(다산북스)는 한 달 만에 2만 부가 나가며 자기계발 부문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하루하루 기록하고 성장하는 삶을 알려 주는 ‘기록전파자’로 변신한 기록학자의 사연을 듣기 위해 지난 4일 오후 서울 마포구 ‘문화제작소 가능성들’ 사무실을 찾았다.
유튜브를 시작한 계기를 묻자 김 교수는 2014년 세월호 참사 이야기를 꺼냈다. “기록학자니까 당연히 동물적 감각으로 기록하러 가야겠다 싶었죠. 전남 진도에 한 달 상주하면서 기록 수집 작업을 했고 그해 11월까지 기록학자들이 교대로 거기를 내려갔어요. 기록을 수집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을 담아 한국 사회의 역사로 남겨두겠다는 의지였죠.”
그는 이현정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 등과 함께 4·16참사와 그 희생자에 대한 기록을 6년 동안 모아 2020년 100권 분량의 세월호 구술증언록 <그날을 말한다>을 완간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록을 모으고 관리하는 비영리기관인 ‘4·16기억저장소’ 운영위원인 두 사람은 3년 동안 써내려간 일기를 모아 <고잔동 일기>를 펴내기도 했다.
“작업을 오래 하다 보니 유가족들이랑 친해졌는데, 컴퓨터를 몰라 성명서를 못 쓰는 유가족이 많은 거예요. 거기서 충격을 받고 2019년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4·16기억저장소 사무실에서 아홉 분에게 컴퓨터를 가르쳤어요. 자판에 익숙해지게 하려고 카카오톡도 컴퓨터(PC)에서만 하도록 하고 스마트폰으로 하다가 걸리면 엄청 야단쳤죠.”
6개월쯤 지나 유가족이 책을 읽고 내용을 요약할 수 있게 되자 새로운 과제를 내줬다. 아이가 썼던 일기와 사진, 상장, 졸업장 등 집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 자료집을 직접 만들어보라는 것. 9명 중 4명이 그 과제를 해냈다.
“제가 기록학을 해서 메모나 기록을 활용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지만, 국가 정책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는 처음 적용해본 거예요. 유가족들 덕에 기록이 우리의 일상과 만나야 한다는 자각을 할 수 있었고, 나이와 상관없이 변화 가능하다는 확신도 갖게 됐어요.”
유튜브는 그 전까지 잘 몰랐지만 “사람에 닿기 위해” 2020년 말부터 무작정 시작했다. 대학원생 3명이 뜻을 같이했다. 초기에는 엄청 헤맸지만 조회 수와 구독자 수가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정부·사회의 기록’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살아온 김 교수는 ‘사람의 삶과 기록’이란 주제의 활동도 가능하겠다는 걸 유튜브를 통해 확인했다.
이어 온라인 교육 프로그램인 ‘아이캔유튜브대학’을 재작년에 열었다. 한 학기 3달씩, 1년 총 4학기로 구성했다. 한 학기 수업료는 9만9천원. 비대면 강의 뒤 모바일 단체 대화방에서 답글을 다는 식으로 소통한다. 그는 “공부할 때 아웃풋(결과물)이 되게 중요한데 사람들이 책을 읽거나 공부하면서 아웃풋을 안 만드는 경우가 너무 많다”며 “그러면 시간이 지나가면 다 휘발돼버린다”고 지적했다.
아이캔유튜브대학에서 30분짜리 강의를 들으면 핵심적인 내용을 노트 한쪽 정도로 메모한 뒤 사진을 찍어 공유해야 한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강의 내용을 고교 2년생한테 설명한다고 생각하고 카드를 정서체로 작성하는 과제까지 마쳐야 한다.
“한 학기에 30분짜리 강의 16번 말고도 책을 두 권씩 읽거든요. 읽으면서 메모하고 다시 독서 카드로 정리한 뒤 온라인 모임에서 10분씩 말하기를 시켜요. 많이 하는 분은 한 달에 네 번까지 발표하는데 어떻게 성장을 안 하겠습니까?”
기록이라는 수단을 이용한 공부 방법을 그는 ‘메모 공부법’이라고 부른다. 1년 수업을 이수하고 메모 공부법을 몸에 완전히 익힌 졸업생이 이달까지 200명 넘게 나왔다.
“제가 세월호 유가족이랑 조금만 같이 작업해도 성과가 나왔듯이 졸업생은 무엇이든 공부해서 자기 삶을 개척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잖아요. 지난해 8월 3년 반 임기를 남겨두고 명지대를 조기 퇴임해 이 회사(문화제작소 가능성들)를 본업으로 삼은 이유입니다.”
회사에는 4·16참사 때 기록 작업을 함께한 이현정 교수도 비상임이사로 합류했다. 직원들은 대부분 아이캔유튜브대학 졸업생들이다. 김 교수는 <거인의 노트>가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졸업생들 덕분이라고 했다. 메모 공부법을 경험한 사람들이 소셜미디어로 입소문을 냈다는 것.
책 제목은 졸업생의 강좌 후기에서 따왔다. 1기 졸업생 중 40대 여성이 남긴 후기였다. 어릴 때 환경이 어려워 대학을 못 가 배움에 한이 있었던 그는 애들 키우고 나서 사이버대학에 입학했는데 공부가 안 돼 중도 포기했다. 그런데 아이캔유튜브대학을 수강하며 강의 내용을 자기식으로 정리하니 기억에 계속 남는다는 걸 느꼈고 자신의 성장을 확신하게 됐다. 후기 마지막에 과학자 아이작 뉴턴의 명언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섰기 때문’을 인용하며 이렇게 적었다. ‘이제 내가 거인이 돼 내 어깨 위에 아이들을 태워 멀리 바라볼 수 있도록 하고 싶다.’
“책 제목을 보고 제가 거인이라고 오해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게 아니고 우리 모두 기록이라는 방법을 통해 ‘거인으로 성장하자’는 의미입니다. 내 어깨 위에 다른 사람을 태우고, 그렇게 성장한 사람의 어깨 위에 다시 내가 올라타는 식으로 함께 성장하는 사회로 가자는 의지를 담았습니다.”
원낙연 선임기자 yan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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