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군 놀이’의 시대

한겨레 2023. 4. 12.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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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2016년 12월3일 오후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6차 주말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을 가득 메운 채 촛불을 들고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세상읽기] 조문영 |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주군 찾기’는 인류학자들이 원주민 사회의 역사에서 종종 발견한 문화 현상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해줄 영웅적인 지도자를 찾고, 지도자는 의례와 상징을 동원해 위계적 연대를 공고히 한다. 역사인류학 고전인 <역사의 섬들>에서 마셜 살린스는 주군 찾기의 실례를 여럿 소개한다. 아프리카의 응구니족은 재해와 약탈을 피해 자발적 종속을 택한 자들이 거대한 무리를 이루면서 부족국가로 세를 확장했다. 사람들은 전쟁에서 지도자를 빼앗긴 순간 본능적 무력감에 빠질 정도여서, 국가는 “몇몇 개인의 영광을 투사하는 구조적 수단”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주군의 영향력은 유럽과의 접촉 이후에도 계속됐다. 피지의 왕은 선교사에게 자신이 기독교로 개종하면 모두가 자신을 따라 기독교도가 될 거라 장담할 정도였다. 개종은 종교적 신념의 표현이 아니라 영웅 정치의 일부인 셈이었다. 18세기 영국 탐험가 제임스 쿡 선장이 하와이에 닻을 내렸을 때, 평민 여성들은 서양인 선원들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 갑판으로 뛰어들었다. 성적 결합이 단순한 ‘알로하’가 아니라 신분 상승의 주요 통로였던 사회에서 유럽인의 등장 이후 주군 찾기 양상이 더 복잡해진 것이다.

사실 주군 찾기는 전근대 원주민 사회의 철 지난 관행이 아니다. 강력한 아버지 지도자를 섬기는 집단은 세계 곳곳에 있다. 권위주의 국가는 물론 시민의 자발성을 강조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주군 찾기는 계속된다. 추종자들은 포퓰리즘으로 비난받을수록 더 단결하고, 성과 속의 경계를 뭉개는 대신 선과 악의 구분은 강화한다.올해 초 경북 의성군에 들렀다가 ‘자유통일 3·1절 광화문 국민대회 투어’ 현수막을 봤다. ‘선착순 150명 모집’ 문구 옆 사진에는 ‘의성이 낳은 이 시대 영적 지도자 전광훈 목사’가 태극기를 들고 연설 중이었다. 그가 목사로 있는 사랑제일교회가 재개발 보상을 두고 벌이는 진흙탕 싸움은 바깥에선 ‘알박기’로 보여도 내부에선 성전(聖戰)이다.

살린스는 하와이 역사에서 주군의 권위가 무너지는 과정을 카푸(kapu)라는 금기의 변화로 설명한다. 지배자들이 신의 은총을 약속하는 금기를 유럽과의 교역을 독점하는 용도로 사용하자 평민들의 저항이 시작됐다. 카푸도, 주군도 신성함을 잃었다. 하지만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일부 광신도를 제외하면) 주군의 영원성을 바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대신 주군 찾기는 주군 놀이에 가까워지고 있다. 정치인은 물론 학자, 의사, 종교인, 연예인, 인플루언서, 성공한 투자자, 일타 강사, <더 글로리>의 동은, 엠비티아이(MBTI)라는 우주론 등등…. 추종하고 의지하는 주군의 목록은 계속 늘어나고 바뀐다. 나를 위로하고 불안과 억울함을 달래줄 누구라도, 무엇이라도 주군이 될 수 있다.

주군을 쉽게 갈아타는 시대는 달리 말하면 주군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시대다. 누구라도 믿고 싶지만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시대다. 의지할 주군을 찾기보다 행동하는 ‘나’에게, 소통하는 ‘우리’에게 신뢰를 건넨 시절도 물론 있었다. 2018년 1월,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을 거쳐 문재인 정부가 등장하고 얼마 안 돼 <한겨레>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많은 시민이 ‘촛불’을 희망으로 번역했던, (아무개 지도자가 아닌) ‘촛불 시민’이 역사의 주체로, 민주주의의 주역으로 등장한 때였다. 그로부터 5년여가 흐른 지금, 촛불을 ‘항쟁’으로, ‘혁명’으로 부르는 사람들은 부쩍 줄었다. 광장의 잡음을 매끄럽게 통역할 지도부를 거부했던, 각자의 다양한 구호가 별이 되고 성좌를 이루는 세계를 바랐던 시민들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누군가는 주군을 수시로 바꿔가며 실망, 냉소, 분노를 배설 중이겠으나, 또 다른 누군가는 다른 미래를 만들기 위해 묵묵히 분투하고 있지 않을까.

사회학자 백승욱은 “말하지 않아야 하고 할 수 있는 말이 없을 때 말을 중단하는 것”이 지식인들이 가장 배우기 어려운 덕목이라 했다(<1991년 잊힌 퇴조의 출발점>). 지난 5년 동안 말의 무게를 감당케 하고, 마침내 말을 중단할 수 있게 해준 <한겨레>에 감사한다. 비판이든 비난이든 고민할 거리를 계속 던져준 독자들에게도 빚졌다. 입으로 불평등을 떠드는 수도권 대학 정규직 교수 말고, 아득바득 불평등과 살고 싸우는 세상의 난쟁이들에게 앞으로 더 많은 발언 기회가 주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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