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100년 전 땅부자는 누구였을까

2023. 4. 12.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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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민대식·민규식 등 민씨 문중 5명이 2181만평 동양척식·식산은행 소유 경성 땅도 수백만평 조선의 관문 신의주 땅 대부분 일본인이 차지 조선인들 소작인 전락… 농지 찾아 터전 떠나

우리 법에는 농사를 직접 짓는 사람만 농지를 가질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하지만 일부 공직자들이 이를 어겨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판사와 검사도 예외는 아니다. 관보에 재산 공개된 고위직 판사와 검사 188명 가운데 36명, 전체의 19.15%는 본인 명의로 농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농지법 위반 소지가 다분하다. 판·검사님조차 불찰을 저지르면서도 갖고 싶은 것이 바로 '땅'인가 보다. 100년 전 신문에서 땅 이야기를 찾아 본다.

1923년 3월 10일자 동아일보에 '국세(國稅) 1천원 이상의 부호(富豪) 조사'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있다. "1년에 1천원, 1만원의 세금을 바치는 사람도 있으니 (중략) 무산자(無産者)의 절치부심(切齒腐心)으로 때려 부수려는 소위 유산계급의 가진바 땅덩이가 얼마나 되는 가를 숫자를 들어 쓰고자 한다."

이어 신문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경성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1년 동안 지세(地稅)와 시가지세(市街地稅)를 합하여 1천원 이상의 세금을 바치는 사람들이 모두 30명으로, 1년 동안 바치는 세금이 26만6000여원이요, 가진 바 땅의 면적이 모두 시가지를 합하여 1억131만4000여평이나 되는 터이다. (중략) 그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기 위하여 먼저 주요한 회사가 소유한 것을 듣건대 4군데의 회사에서 소유한 면적이 3447만8000여평이며 이에 대한 세금이 5만2000여원인데, 그중의 첫째는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로 264만3000평을 소유하고 있으며 세금은 3만7000여원이고 불이흥업(不二興業)의 104만4800여평, 식산은행(殖産銀行)의 155만7000여평, 조선은행(朝鮮銀行)의 6만여평이 그 뒤를 잇고 있다."

동양척식 등 금융기관들의 토지 소유가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개인으로서 경성의 땅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바로 민씨(閔氏) 문중(門中) 5명의 민씨(閔氏)였다. 신문은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조선 사람치고는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민씨 일파의 가진 바는 얼마나 되는가. 옛날 한참 당시에 가장 많은 세력으로 가장 많이 모은 재산은 지금도 역시 많은 세력을 가지고 배불리 살아가는 터인바, 이 숫자는 특별히 평안도 인사와 인연이 있음을 말해 두는바 민씨 다섯 사람의 소유가 대개 2181만여평으로 세금으로 3만6000여원이나 되는 터이다."

가장 많은 땅을 가진 사람은 민대식(閔大植)으로 699만9000여평의 땅에 세금은 1년에 1만2000원이었다. 뒤를 이어 민규식(閔奎植)이 431만7000여평, 민천식(閔天植)이 355만8000여평, 민정식(閔庭植)이 414만3000여 평, 민병석(閔丙奭)이 279만3000여평을 보유했다.

학교 재단법인도 땅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숙명여교(淑明女校)가 358만8000여평으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로는 진명여교(進明女校)의 206만7000여평, 양정의숙(養正義塾)의 202만8000여평이었다. 이 학교들이 땅을 많이 가지고 있는 이유에 대해 당시 신문들은 "덕수궁에서 특별히 떼어준 것"이라고 했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진명여교는 엄준원(嚴俊源)이 누이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嚴氏)로부터 교지(敎旨)를 하사받아 설립한 학교다. 양정의숙은 1905년 순헌황귀비 엄씨의 조카인 엄주익(嚴柱益)이 세운 학교다. 역시 순헌황귀비 엄씨로부터 구(舊) 황실 재산과 내탕금(內帑金)으로 학교 재정을 지원받았다.

숙명여교는 1906년 5월 22일 순헌황귀비 엄씨가 직접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라 이름하여 세운 학교다. 황실로부터 하사받은 황해도 재령군, 전라남도 완도군의 농지를 기금으로 재단을 설립했다. 명신여학교는 1938년 숙명여자전문학교로 이름과 학제를 바꿨다.

경성뿐만 아니라 지방 곳곳의 땅 소유 기사가 눈에 띈다. 1923년 3월 7일자 동아일보 기사다. "신의주는 조선의 관문(關門)이라 할만한 주요지(主要地)임은 세상이 다 아는 바이어니와, 80만평이나 되는 신의주의 전체 면적 중 우리의 소유가 얼마나 되는가. 해마다 우리 조선인의 소유는 줄어드는데, 현재 우리의 손에 있다는 것은 아래와 같고 그 나머지는 부청(府廳)과 일본인의 소유이라. 이처럼 점점 없어져 버리면 시내에 1만700명의 조선 사람들은 장차 어디다가 집을 짓고 살까. 최근의 조사한 숫자를 들은 즉, 신의주 전체 면적은 80만평이고 그중 조선인 소유는 3만5000평, 중국인 소유는 516평, 그 나머지 76만4484평은 일본인 소유와 관유지(官有地)이다." 즉 신의주의 95.6%가 일본인과 관유지였다.

이렇게 신의주 땅을 대부분 차지한 일본인들은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1922년 12월 25일자 동아일보를 보자. "신의주에서는 일본 사람 지주(地主)가 텃세를 졸지에 올려서 그 터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 30명이 분개하여 당국에 진정을 하였다 한다. (중략) 척식회사라는 것은 도무지 무엇을 하자고 생긴 것인지, 그 목적을 알 수 없거니와 집을 많이 지으면 그 지방이 발전할 것은 물론인데 이를 허락지 아니함은 그곳의 발전을 방해함이 아닌가. 그 땅을 빌려주지 않으려거든 차라리 사고자 하는 사람에게 팔아 가지고 황무지를 다시 사서 개간하는 것이 척식회사의 목적에 맞지 아니할까. 조선의 농촌을 멸망케 하는 척식회사, 조선의 도회(都會)를 발전치 못하게 하는 척식회사는 어디로 보던지 조선인의 해독(害毒)이다."

결국 조선 사람들은 땅을 뺏기고 소작인으로 전락했다. 농사지을 땅을 찾아 머나먼 간도, 노령(露領; 러시아) 등지로 떠나는 사람도 많았다. "일한병합 이후로 10여년을 계속해 들어오는 동양척식회사의 이민은 방방곡곡에 퍼졌으며 일본 기타 외국으로 들어온 부자는 삼천리강산을 파먹기 위하여 각각 그 무서운 팔뚝을 놀리는 터이라. 그리하여 우리는 땅과 집을 헐한 값에 팔아먹고는 시베리아 찬 바람에 갈퀴를 잡고, 만주의 빈 들에 호미를 메고 헤매는 운명에 빠졌으며 방금도 헤매는 중이라."(1923년 3월 4일자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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