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11의 목소리] 나는 걸어가는 밥풀이오
이하나 | 지역교육네트워크 이룸 대표
“쌤, 현수막을 내려달라는데요.”
잠시 쉬려고 누웠다가 전화를 받았다. 시청이었다. 며칠 뒤 시작할 문화다양성 인문학 프로그램 홍보 현수막을 치워달라는 말이었다. 2019년부터 시 산하기관과 논의해 추진해온 일이었다. 학교와 예술가를 대상으로 교육프로그램을 만들어 진행했고, 2022년에는 학교교육 이외 캠페인과 예술가가 결합하는 시민 참여 프로그램, 인문학 프로그램을 만들어 추진하려는 중이었다.
현수막 하나 내리는 게 뭐 어려운 일이겠냐 싶겠지만, 그 현수막에는 수년 간의 애환과 내가 지향해온 가치가 담겨 있다. 일부 기독교단체에서 항의전화를 걸어왔다고 했다. 지역의 진보적인 단체 활동 가운데 자신들 뜻에 맞지 않는 게 있으면, 전화는 물론 집회나 시위까지 연다. 그렇게 차별금지법 제정, 노동인권 보장, 평화통일 운동에 반대하고, 블로그를 통해 허위 정보를 퍼트리기도 했다.
전화를 받은 그 날은 지방선거가 끝나고 한달쯤 뒤, 그러니까 새로운 민선 8기 지방정부 출범(2022년 6월1일) 며칠 전이었다. 시장 취임식에 훼방을 놓겠다는 협박 전화가 시청과 산하기관, 행사 수행단체에 조직적으로 걸려 왔다. ‘동성애를 가르쳐서 나라가 망한다’며.
시민사회단체가 모인 연대회의에서는 공동대응을 결정하고 당일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현수막을 내린 인문학 프로그램은 일단 연기하기로 했다. 사업을 재개할 방법을 찾으며 실무자들이 협의했다. 일반시민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시청 상황을 파악해 시의원들에게 호소하고 성명서도 썼다. 하지만 시 산하기관과 수행단체 사이 간격은 좁혀지지 않았고, 산하기관 담당자와 단체 활동가들 모두 상처를 입었다.
우리는 시 지원금을 반납하고 시민기금을 모아 사업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공론화를 위해 집담회를 열었고, 여러 관계자를 초대했다. 장소를 대관하고 현수막을 만들고 웹자보를 만들어 홍보했다.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언론사 인터뷰 요청에도 응했다. 지역활동가들이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보내줬다. 정책제안서를 만들어 시청에 전했고, 문화다양성 증진에 관한 조례 제정안과 타지역 사례를 정리해 기초의원 몇명에게 보냈다. ‘다양성’이라는 단어 때문에 누군가 상처받고 오래 준비해온 사업이 엎어지는 일을 언제까지 봐야 할까.
우리 활동 목표는 분명하다. 더 많은 사람이 보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 억울하게 죽지 않는 세상을 향해 함께 어깨 걸고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한꺼번에 바뀌지 않고 우리의 힘은 미약하기만 하다.
작은 조직은 한해 예산이 1억원에도 못 미친다. 이런 단체 활동가는 승진은커녕 단체가 재정적으로 힘들어지면 시민사회를 떠나기도 한다. 2019년 사회적협동조합 동행의 연구를 보면, 10년차 활동가 급여 평균은 230만원 정도. 나처럼 급여가 없거나 생활비가 더 필요하면 투잡, 쓰리잡을 뛰어야 한다.
비영리단체 활동가의 영역은 젠더, 노동, 장애, 빈곤, 환경, 경제 등 생활 전 분야에 걸쳐 있다. 억울하거나 화난 시민이 우리를 찾아오고, 시민과 연결지점을 찾는 정부기관도 우리를 찾는다. 아파트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사실상 해고당했다거나,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다거나, 지하에 묻은 고압선 안전이 의심된다거나, 시에서 대나무를 몽땅 베어버렸다거나, 취약계층을 위한 무상급식소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집회를 연다거나…. 활동가들은 시민을 만나 얘기를 듣고, 내용을 파악하고, 관계법령과 관련부서를 확인하고, 갈등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 양쪽에 제시한다.
하지만 우리는 10년 동안 외쳐도 흠집 하나 나지 않는 콘크리트 같은 사람들과 분노, 슬픔으로 고함치고 우는 사람들 사이에서 “시민단체는 뭘 하느냐!”는 책망을 들어야 하는 밥풀 같은 존재다. 자기 신념이 있으니 세상을 보는 관점이 또렷하고, 눈 뜨고 있으면 세상 모든 일이 활동영역으로 보인다. 사생활과 업무가 분리되지 않아 노동인권도 없다. 지역에 집중하니 우물 안 개구리가 될까 봐 불안하고 답답하다.
비영리단체 활동가는 역할이 앞으로 더 중요해진다지만, 대우가 형편없으니 종사자가 늘어날 전망은 없다고도 한다. 활동가들은 타인의 부당한 처우에 분노하지만, 막상 자기 것 챙기는 데는 서툴다. ‘돈 벌 생각이었으면 다른 일 해야지.’ 목소리 큰 사람들은 이 안에서도 권력을 가지고 옮겨가지만, 다수 활동가는 흔적 없이 일한다. 점일 뿐이다. 활동가끼리 손을 잡아 선을 그어두면, 면을 채우는 건 시민의 몫이다. 마중물이 돼 큰물이 쏟아질 때 속절없이 사라져도 면과 면이 가득 차는 날이 온다고 꿈꾸면 괜찮다. 희생이나 헌신이라 생각한 적 없고 착한 성품도 아니다. 눈에 보이는 길이 있기에 걷는다. 언제 도착할지는 모른다. 밥풀들이 늘어서면 개미라도 모이지 않을까. 구둣발에 으깨지면 풀이라도 돋겠지. 그 정도면 될 것 같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4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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