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8시간 연장근로 필요한데···고용부는 여론조사 시작도 못해
31%가 주 12시간 연장근로 경험
中企 근로시간 유연화 절실한데
정치권·노동계 전방위적 압박에
정부, 설문조사 문항도 못만들어
17일께 개편안 운명 결정될 듯
“우리 경제의 허리인 중소기업들은 법 위반을 감수하면서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산업 현장의 다양성, 인력 수급 동향을 고려했을 때 중소기업의 생존과 성장을 위해 근로시간 유연화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3고(고물가·고환율·고금리)와 만성적인 인력난에 허덕이는 중소기업들이 근로시간 개편안에 미온적인 정부의 태도에 ‘기약 없는 희망 고문’을 당하고 있다. 연장근로 한도에 따라 인력 운용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소기업계는 근로시간 유연화가 시급한 상황이지만 갈팡질팡하는 정부의 모습에 불확실성만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정부 역시 기업들의 요구 사항을 이해하면서도 노동계의 반발에 진퇴양난인 모습이다.
12일 중소기업중앙회가 539개사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한 결과에서는 근로시간 유연화에 대한 중소기업계의 절실함을 확인할 수 있다.
이번 조사에서 ‘최근 1년간 주 12시간 이상의 연장근로가 필요한 경험이 있었다’는 응답은 31.2%에 달했다. 중소기업 10곳 중 3곳이 주 12시간 이상의 연장근로가 필요했을 정도로 근로시간이 요구된 것이다. 특히 우리 중소기업의 근간이 되는 제조업의 경우 연장근로를 경험한 기업이 40.8%로 비제조업(21.0%)에 비해 두 배 정도 높았다. 제조 중소기업에 연장근로 단위 기간 확대가 더 절실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근로시간 연장 문제로 납품을 포기하는 등 실질적으로 피해를 본 기업들도 이번 조사에서 확인됐다. 주 12시간 이상의 연장근로가 필요했었다고 응답한 기업들 중 지난 1년간 인력 활용의 어려움으로 제품 또는 서비스 공급을 포기한 적이 있는 기업은 18.5%로 나타났다. 피해 기업도 제조업(23.0%) 분야가 비제조업 기업(9.1%) 대비 높게 나타났다. 중소기업 관계자는 “업무량이 매일 균일하게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주문처와 시장 상황에 따라 납품 물량이 한꺼번에 몰리는 경우가 다반사”라며 “근로시간 제한으로 납품 물량을 맞추지 못하면 거래처와의 신뢰가 틀어지게 돼 결국 공장 문을 닫아야 하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법을 어길 수밖에 없는 처지”라고 하소연했다.
중소기업계의 이러한 고충에도 정부의 발걸음은 더디기만 하다. 대통령실과 정치권, 여기에 노동계까지 압박하자 근로시간 제도 개편 움직임에 제동이 걸렸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이달 10일 정부세종청사에서 노동개혁추진점검회의를 열고 “근로시간 제도 개편에 대한 국민 우려를 해소하려면 현장·국민과의 소통이 중요하다”며 “제도 보완은 국민 의견이 토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당초 입법 예고 시한인 이달 17일 이전에 실시할 예정이었던 대국민 6000명 설문 조사를 아직 시작도 안 했다. 국민 설문 조사와 그룹별 심층면접(FGI)를 할 예정이지만 아직 설문 조사 문항조차 만들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설문 조사 결과는 근로시간 개편 효과와 무관한 국정 지지도가 반영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여기에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등 노동계와는 공식적인 만남도 없었다. 이정희 민주노총 정책실장은 “정부가 표방한 것은 현대 산업사회에서 낡은 근로기준법을 대체할 새로운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지만 자신의 의사와 일치하는 전문가와 학자들을 모아서 연구회를 구성해 자신의 의도대로 연구하게 하고 그 결과를 발표했다”며 “5개월여 동안 단 한 차례도 총연맹 단위 노동계와의 간담회나 의견 수렴을 거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또 다른 변수는 여소야대 국면에서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주 4.5일제를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 4.5일제는 근로시간을 줄이는 기업에 인센티브를 주는 게 골자다. 집중 근로를 쉽게 하는 방향의 개편안과 사실상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당도 고용부처럼 개편안에 대한 국민 의견 수렴이 우선 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결국 고용부는 입법 예고를 마치는 17일쯤 개편안 입법을 서두르지 않겠다는 내용의 공식 입장을 낼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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