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이미야케 검은색 티셔츠 평생 입은 잡스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2023. 4. 12.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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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 직원들 유니폼에 큰 감명…175달러에 100벌 주문, 혼자만의 유니폼으로 삼아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이세이미야케①

사진 스티브잡스가 입은 이세이미야케 블랙 반목넥(사진②) 사진출처:위키피디아


2023년 3월 17일 윤석열 대통령의 일본 방문에 동행했던 김건희 여사는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를 만났다. 안도 다다오 건축가는 제주도 휘닉스 아일랜드 내에 있는 글라스 하우스와 지니어스 로사이 건축물, 제주도 본테 미술관, 원주 한솔 뮤지엄 산을 건축한 한국에서는 꽤 유명한 일본 건축가다.

그는 이날 김 여사에게 이세이미야케 옷을 선물했다(사진①). 이에 김 여사는 “패션도 건축이다”라고 말했다. 안도 건축가는 “이세이미야케의 옷은 정말 건축적”이라며 “이세이 미야케는 훌륭한 디자이너”라고 화답했다고 한다. 안도 건축가는 이세이 미야케가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디자이너이고 자신의 50년 친구라고 소개했다. 

이세이미야케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은 세상을 뒤바꾼 테크놀로지의 선두자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신제품 발표회 때 입은 검은색 반목넥 티셔츠 때문이다. 잡스는 이세이미야케의 검은색 반목넥 티셔츠와 리바이스 501 청바지, 뉴발란스 992 운동화로 자신만의 아이텐티티를 만들었다.


1995년 가을 겨울 파리 콜렉션에 보여준 주름 원피스 사진 출처; Getty images
이세이미야케의 주름 원피스 사진 출처 : Isseymiyake.com



1968년 파리 혁명과 실험 예술·히피 영향 받아
 
잡스 창업자는 1980년 초 일본을 방문했을 때 소니 직원들의 유니폼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잡스 창업자는 모리타 아키오 전 소니 회장이 “유니폼이 회사 직원들을 단결해 주는 수단”이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애플 직원들에게도 유니폼을 입힐 생각을 했다. 그리고 바로 소니 유니폼을 만들었던 이세이미야케에 연락해 유니폼 제작을 의뢰했다.

하지만 애플 직원들은 유니폼 입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때문에 잡스 창업자는 혼자만이라도 유니폼을 입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잡스 창업자는 혼자만을 위한 유니폼을 주문했다. 그는 이세이미야케의 검정 반목넥 티셔츠를 175달러에 100벌을 주문했다고 한다. 그만큼 잡스 창업자는 이세이미야케의 빅 팬이었고 검은색 반목넥 티셔츠를 평생 입고 다녔다(사진②). 이세이미야케 제품은 잡스 창업자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것이었다.

이세이 미야케는 1938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원자 폭탄이 쓸고 지나간 폐허 속에서 자라났다. 전쟁이 끝나고 히로시마의 폐허에 미국 문화가 봇물 터지듯 들어왔다. 이때 미국의 패션 잡지인 ‘보그’와 ‘바자’가 들어왔고 여자 형제들이 많았던 그는 유년기부터 이런 패션 잡지를 보면서 패션에 대한 감각을 키우고 꿈꾸기 시작했다. 

1963년 타마미술대학(도쿄에 있는 사립 미술대학) 그래픽 디자인학과를 다니며 문화복장학원에서 의상 공부를 했다. 재학 시절 제1회 컬렉션 ‘천과 돌의 시’를 발표하며 패션계에 입문했다. 1965년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파리로 건너가 파리 의상조합학교에서 1년간 공부한 후 1966년 기 라로쉬의 보조 디자이너로 입사했다. 이후 1968년 지방시의 보조 디자이너로 일했다.

이때 이세이 미야케의 디자인 세계에 큰 영향을 준 사건이 있었다. 바로 1968년 5월 학생과 노동자들이 주축이 돼 기존의 모든 관습적 체제에 저항했던 파리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이는 유럽 전체 예술에도 큰 물결이 됐고 이세이 미야케 또한 큰 영향을 받았다. 이후 그는 앤디 워홀, 잭슨 폴록, 윌리엄 드 쿠닝 등 같은 팝아트의 열기와 실험 예술로 뜨거운 세계 문화의 중심지인 뉴욕에 관심이 많았다.

1969년 뉴욕으로 건너가 제프리 빈에서 기성복을 디자인했고 이때 미국에서 유행한 히피 문화도 이세이 미야케에게 많은 영향을 줬다. 이세이 미야케라는 이름이 하나의 브랜드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부터였다. 32세의 이세이 미야케는 1970년 일본에 돌아와 ‘미야케 디자인 스튜디오’를 열었다. 1971년 이세이미야케 회사를 설립하고 뉴욕에서 첫째 컬렉션을 발표한 후 뉴욕 블루밍데일백화점에 이세이미야케 매장을 열었다.


이세이미야케 사진 출처 : topic/corbis


김건희 여사(왼쪽)가 안도 다다오에게서 이세이미야케의 옷을 선물 받고 있는 장면.(사진①) 사진출처:연합뉴스


철학적 깊이 보여준 첫 컬렉션 ‘한 장의 천’

1973년 파리에서 가을겨울 컬렉션을 발표했다. 파리에서 연 첫째 컬렉션의 주제는 ‘한 장의 천(A Piece of cloth)’이었고 그의 패션에 대한 철학적 깊이를 보여 줬다. 그는 기모노와 사무라이의 갑옷 등 일본의 전통 의상과 아프리카의 직물에서 영감을 받은 옷을 발표했다. 그 결과 봉제선과 재단을 최소화할 수 있었고 옷의 모양과 형태 또한 보통의 서양 의복과 완전히 달랐다.

‘한 장의 천’이라는 독특한 화두에서 시작된 컬렉션 덕분에 그는 파리 컬렉션에 데뷔하면서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이탈리아 플로렌스의 박물관에 전시된 이세이 미야케의 드레스 ‘한 장의 천’은 솔기나 여밈이 없는 한 장의 천이 신체 위에서 흘러내리도록 미니멀하게 디자인됐다. 그는 옷에 몸을 맞춰야 하는 서양의 의복이 싫다고 공공연하게 말하며 “나는 늘 한 장의 천으로 돌아간다. 그것이 옷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이기 때문이다”라는 어록을 남겼다. 

미야케 디자인 스튜디오(MDS)는 새롭고도 전통적인 다양한 영역의 소재들을 사용하면서 형의 단순성을 강조했다. 1970년대 그 단순화는 궁극적으로 솔기나 여밈이 없는 단순한 정사각형으로 된 한 장의 천에 소매가 추가된 본질적인 의복을 가져왔다. 이 미니멀한 의복은 서양의 의복 모습이라기보다는 일본의 기모노 전통에서 나온 것이다. 천이 신체 위에서 흘러내리도록 한 디자인은 그동안 서구 패션을 지배하던 신체 위에서의 의복 구성이라는 사고와는 대조를 이룬다.

이처럼 이세이 미야케는 동양적이지도 서양적이지도 않은 새로운 전통을 개발했는데 이것은 그의 어휘로 표현하면 ‘동서양의 만남(East Meets West)’이었다. 한 장의 천으로 나타난 단순화된 옷의 결과는 클래식하면서도 유행을 타지 않는 것이었다. 

참고 도서 : ‘최고의 명품, 최고의 디자이너, 명수진, 삼양미디어’

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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