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도 다 탔어? 흔적도 없어?” 불탄 인월사 앞 노승은 탄식했다
[봄철 산불]
“우리 옷도 다 탔어? 부처님도 다 탔어? 흔적도 없어?”
12일 오전 강원도 강릉시 저동 인월사에서 만난 대성(83)스님은 주지인 재범(60)스님에게 같은 질문을 반복해 물었다. 이곳에서만 50년 넘게 수행했다는 대성스님은 불이 나고 처음 본 절의 모습에 망연자실했다. 재범스님은 “중들이 가진 거라곤 옷가지뿐이어서 자꾸 큰스님이 옷도 탔느냐고 물어보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인월사는 지난 11일 강릉 산불로 대웅전 등 사찰 건물 4채가 모두 탔다. 나무로 만든 불상은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불이 빠르게 번지면서 스님들은 짐을 챙길 틈도 없이 몸만 피했다. 재범스님은 “뒷산에서 산불이 가끔 나긴 했지만, 사찰이 이렇게까지 불에 탄 건 처음”이라고 했다. “부처님, 우리 어떻게 해야 합니까.” 80대 노승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경포대가 내려다보이는 이 일대 펜션 골목도 초토화됐다. 골목 안 자리한 펜션 모두 나란히 불에 탔다. 펜션 곳곳에선 수도관이 터져 물이 새면서 잿더미와 섞여 흘러내렸다. 잔불이 남았는지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도 보였다.
“바로 눈앞에서 펜션 4동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고,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당장 살 곳도 없으니 달방을 전전하며 생계를 걱정해야 할 처집니다.” 펜션단지에서 만난 전명환(36)씨가 까맣게 잿더미가 된 펜션 잔해 위에서 답답한 듯 가슴을 쳤다. 전씨는 산불이 발생한 전날 마을 어귀에 설치된 비상소화장치를 열고 온몸에 물을 끼얹은 채 주택을 덮친 화마와 사투를 벌였다. 하지만 불붙은 솔방울이 사방팔방에서 날아들자 펜션 곳곳에선 시뻘건 불길이 치솟고 검은 연기까지 주위를 덮으면서 주위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초속 30m의 태풍급 강풍 탓에 소방호스를 통해 뿜어댄 물줄기마저 주위로 흩어졌다. 결국 전씨는 도망치듯 화재 현장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전씨는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전씨는 “화재보험금 해봐야 2억원을 넘지 않고, 특별재난지역 보상금 수천만원 정도에 무이자 대출 등이 고작일 텐데 이 돈으론 건물은 고사하고 바비큐장밖에 짓지 못한다. 주위 펜션 사장님들 대부분이 생계형인데 이렇게 날벼락을 맞으면 재기 자체가 힘들다. 철거 비용조차 부담이라 이대로 잔해를 방치하면 펜션단지 일대가 흉물이 돼 상권이 다 죽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10년 넘게 펜션을 운영 중인 정종범(51)씨도 뼈대만 남고 모두 타버린 자신의 펜션을 이날 오전 처음 확인했다. “어제 건물 뒤편에 불이 붙는 걸 보고 급하게 대피했어. 그런데 이렇게 다 타버릴 줄은….” 정씨는 긴 한숨을 내뱉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오는 5월은 어린이날, 석가탄신일 등 황금연휴가 많아 이미 예약이 다 찬 상태였다고 한다. “환불은 여행예약업체에서 알아서 처리하겠지만, 펜션 운영하느라 매달 대출 이자만 100만원 넘게 내고 있는데 어떡해요. 앞이 캄캄합니다. 진짜.”
안현동에서 만난 함종금(72)씨도 화마에 모든 것을 잃었다. “아무것도 못 건졌어. 내 자가용도 다 타고 없잖아. 아휴.” 함씨가 모두 타 버린 자신의 집 앞에서 불에 타 쓰러진 자신의 전기자전거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 막내딸이 다리가 불편한 함씨를 위해 사준 선물이었다. 산불이 났던 지난 11일 함씨는 노인일자리사업에 참여하려고 아침 8시께 집을 나섰다. 여느 때처럼 전기자전거를 타고 출발했는데, 이날은 유독 바람이 심하게 불어 마을 앞에서 발길을 돌려 집에 와 자전거를 두고 다시 나갔다. “복도 없지. 매일 타고 다녔는데, 어제는 바람 때문에 휘청휘청하더라고. 그래서 집에 두고 나갔더니 이 지경이 됐어.”
함씨의 집은 물론 마당 앞 정원, 뒤뜰까지 모두 다 타버렸다. 노인일자리사업을 마치고 오면 따려고 했던 두릅도 나무 전체가 새까맣게 탔다. 함씨는 지난해 겨울 딸들이 사준 에어컨과 식기세척기도 마음이 쓰였다. “에어컨은 한 번 켜보지도 못하고 다 태웠어. 너무 허무하잖아. 어제는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줄줄 나더라니까.” 불 날 때 사용하려고 함씨의 집 앞에 설치한 빨간 비상소화장치도 강한 바람을 타고 온 불길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앞서 전날 오전 8시22분께 강릉시 난곡동에서 산불이 나 8시간 만에 꺼졌다. 이 산불로 축구장 면적(0.714㏊)의 530배에 이르는 산림 379㏊가 소실됐으며 1명이 숨지고 16명이 연기를 마시거나 다치는 등 사상자 16명이 발생했다. 또 주택과 펜션 등 시설물 125곳이 전소되거나 일부가 타는 피해가 났다.
김규현 기자 gyuhyun@hani.co.kr 박수혁 기자 p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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