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달러 패권 美, 희생양 찾고있다

노영우 전문기자(rhoyw@mk.co.kr) 2023. 4. 12.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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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부쩍 떨어지고, 약발도 잘 안받고
게티이미지뱅크

미국에서 태어나는 순간 두 가지로부터 해방된다. 하나는 외국어를 배울 필요가 없다는 것, 다른 하나는 환율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것이다. 실제 미국 학교에서는 중국어와 스페인어 등을 가르치기는 한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면서 느끼는 스트레스에 비할 바가 아니다. 조금만 머리가 굵은 미국 학생들은 '세계 모든 나라가 영어를 배우는데 우리가 그들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다른 나라 말을 배울 필요가 있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환율도 비슷하다. 세계 각국은 매일 미국 달러와의 교환 비율인 환율을 체크한다. 환율 변동폭이 너무 크면 미국의 눈치를 보며 대책에 몰두한다. 미국은 그럴 필요가 없다. 달러가 통용되지 않는 나라가 거의 없는데 굳이 복잡하게 다른 나라 통화와의 교환 비율을 계산기로 두드릴 필요가 없다. '영어와 달러'는 미국을 지탱하는 두 축이다.

이 중 한 축인 달러가 흔들리고 있다. 경제적 징후는 지난 3월에 뚜렷하게 나타났다.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로 촉발된 은행 위기는 미국 국채도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기준금리를 올려 미국 국채 가격이 급락하자 미국 국채를 대량으로 보유하던 SVB는 큰 손실을 봤다. 여기에 불안감을 느낀 예금자들이 돈을 찾으러 은행으로 달려가는 '뱅크런'이 발생했고, 은행은 결국 문을 닫았다. 이 파장은 스위스와 독일 등 유럽으로 옮아갔다. 미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가 나서 급한 불은 껐지만 여진은 이어진다. 연준에 따르면 미국 내 상업은행에서는 3월 한 달 동안 5000억달러에 달하는 예금이 빠져나갔다. 예금자들의 불안이 계속되면서 언제 어느 은행이 문을 닫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이번 위기는 미국이 대외 변수인 환율로부터는 해방될 수 있지만 대내 변수인 국채 가격으로부터는 해방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

미국 국채가 은행 위기의 시발점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달러가 있다. 미국 국채는 달러와 동전의 양면이다. 연준은 국채를 시장에 팔고 사면서 달러의 양을 조절한다. 미국 국채가 신뢰를 잃어 국채 가격이 하락하고 국채 금리가 오르면 연준은 시장에서 국채를 사들여 가격을 안정시킨다. 이 과정에서 연준은 국채를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달러를 찍어낸다. 그러다 시중에 너무 많은 달러가 풀려 달러 가격은 떨어지고 물가가 오르면 연준은 다시 국채를 팔고 달러를 사들여 통화가치를 안정시킨다. 이렇듯 미국 국채와 달러는 서로를 의지하고 둘 간의 적절한 균형을 모색하면서 공생하는 관계다. 이런 공생 관계에 균열이 발생한 것은 2008년 금융위기 때부터다. 당시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촉발된 금융위기가 경제를 강타하자 이를 막기 위해 연준은 양적완화(QE)라는 정책을 내놓고 달러를 마구 찍어내 이 달러로 국채를 사들였다. 시장에서 미국 국채는 씨가 말랐고 달러는 과도하게 넘쳤다. 연준의 대차대조표는 이런 상황을 지표로 보여준다. 연준의 주요 자산은 미국 국채와 주택저당증권(MBS) 등 각종 채권, 부채는 연준이 찍어내는 달러다. 달러를 찍어내 시장에서 채권을 사는 방식으로 돈을 공급하면 연준의 자산은 늘어난다. 연준 자산은 글로벌 금융위기 전인 2007년 8월에는 8650억달러 정도였다. 양적완화 정책 후인 2015년 7월 연준의 자산은 4조5000억달러를 넘어섰다. 8년 새 5배 넘는 수준까지 폭증했다.

연준이 이 정도 돈을 풀었으면 시중에 달러가 넘쳐 나고 이는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는 것이 상식적이다. 하지만 당시 미국 소비자물가상승률은 1~3%대에 그쳤다. 여기에 달러의 마법이 있다. 연준이 돈을 풀었을 때 미국 물가가 올라 달러 값이 떨어진다면 돈을 푼 것의 의미가 없다. 하지만 미국이 달러를 찍어내면 이 달러는 미국 외에 많은 나라가 상당 부분 소비해준다.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한국, 중국, 일본, 영국 등 주요 39개국 외환보유액은 2007년 4조9619억달러에서 2013년에는 9조490억달러로 2배가량 늘었다. 미국 달러와 국채가 해외에서 외환보유액으로 소비되면서 세계적으로 달러 수요가 급증했다. 미국은 천문학적인 돈을 풀었지만 이 돈의 상당 부분이 해외로 흘러가면서 미국 내 물가는 안정됐다. 기축통화라는 '달러의 힘' 덕분에 미국은 물가 부담 없이 돈을 맘대로 풀어 금융위기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과하면 부족함만 못하다는 '과유불급'의 격언은 미국에도 적용된다. 연준의 달러에 대한 자신감은 2020년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경제위기 때도 반복됐다. 코로나19로 경기 침체가 심해지자 연준은 2020년 3월 '무제한 양적완화'를 선포하며 자산을 대폭 늘리고 돈을 풀었다. 연준의 자산은 2020년 1월 4조1736억달러에서 2년 후인 2022년 3월에는 8조9000억달러로 약 4조7300억달러 폭증했다. 증가폭은 2008년 금융위기 때보다 훨씬 컸다. 하지만 이때 미국 주변 상황은 글로벌 금융위기 때와 달랐다.

2008년에는 연준의 돈 풀기가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2022년에는 돈을 푼 지 2년 만에 물가가 연 9%넘게 치솟았다. 양적완화의 속도가 빨랐던 것도 원인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2008년 이후 찍어낸 돈의 양이 미국 경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났기 때문이다. 미국 외 다른 나라들도 2008년 금융위기 때처럼 외환보유액을 공격적으로 늘리지 않았다. 외환보유액이 이미 포화 상태로 늘어났고 무분별하게 찍어내는 달러에 대한 불신도 커졌다. 39개국의 외환보유액은 2020년 10조2478억달러에서 2021년에는 10조7173억달러로 약 4700억달러 늘어나는 데 그쳤다. 2022년에는 이들 국가의 외환보유액은 9조9167억달러로 전년보다 8006억달러 감소했다. 미국과 대립하는 중국이 미국 국채를 공격적으로 팔았고 우방국인 일본도 외환보유액을 1780억달러 줄였다. 외환보유액을 둘러싼 각국의 입장 변화는 미국이 자기 나라 경제를 살리기 위해 달러를 찍어내는 것이 어느 정도 한계에 다다랐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각국이 외환보유액을 줄이는 과정에서 미국 국채를 팔고 달러 자산을 줄이면서 국채 값과 달러가치 하락을 부추기고 있다.

3월 SVB 사태는 이런 분위기에 기름을 부었다. SVB 사태로 미국 국채는 대표적인 안전자산으로서의 지위가 손상됐다. 각국이 미국 국채를 던지고 금이나 대체자산을 사들이는 분위기도 강해졌다. 이 와중에 연준은 이중적인 태도로 신뢰를 떨어뜨렸다. 연준은 앞에서는 기준금리를 올려 인플레이션을 막겠다고 나섰지만 뒤로는 시장에서 미국 국채를 사들이면서 돈을 풀었다.

연준 자산은 2023년 2월 말 8조3420억달러에서 3월 말에는 8조7337억달러로 4000억달러가량 늘었다. 달러가치 안정을 위해서는 인플레를 잡아야 하지만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서는 국채 값을 잡아야 하는 연준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에 미국 안팎에서 달러의 인기가 떨어지고 달러 수요는 줄고 있다. 연준의 운신의 폭도 그만큼 축소됐다. 위기의 양태는 2008년, 2020년, 2023년에 변하고 있지만 매번 돈을 풀어 사태를 해결하려는 연준의 행태는 바뀐 것이 없다. 이에 대한 실망도 커졌다.

국제 관계도 미국 달러에 불리하게 돌아간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 달러를 지탱해왔던 '페트로 달러'의 지위가 흔들리는 것이다. 페트로 달러는 1970년대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의 정치적 안전을 보장해주는 대신 사우디 원유 매매는 달러로만 하도록 한 협정이다. 이 협정으로 달러는 기축통화의 지위를 확고하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사우디와 미국의 관계가 갈수록 꼬이고 있다. 사우디는 중국과 위안화 무역 결제의 범위를 넓혀갈 움직임을 보이면서 페트로 달러의 지위를 위협하고 있다. 페트로 달러가 붕괴된다면 이는 달러가치의 안정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칠 것임은 자명한 현실이다.

국제적 여건은 달러의 위기를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달러의 위기가 미국 금융 시스템 위기로 쉽게 번지지는 않는다. 달러의 위기가 오면 미국 정부가 나서서 응급 처방을 하면서 시간을 번다. 다음은 미국 내 금융회사들이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달러를 소환한다. 이 과정에서 몇몇 나라가 희생양이 된다. 문제는 미국이 만들었는데 피해는 다른 나라들이 보는 것이 냉혹한 국제 금융 질서의 논리다. 한두 나라에서 달러가 집중적으로 이탈하고 이 경우 대응 능력이 떨어지는 국가는 국가부도로 이어진다. 이런 과정은 선진국도 예외가 아니다. 독일, 영국 등 유럽 국가는 물론 일본도 달러 패권의 희생양이 된 적이 있다. 달러의 이탈과 이에 따른 경제위기로 공포감이 고조되면 각국은 다시 달러 확보에 나선다. 그러면 달러 수요가 늘어나고 달러 값은 다시 오른다. 달러의 위기는 타국으로 전이되고 이 과정에서 미국의 달러 패권은 한층 강해지는 것이 그간 보여준 행보다.

각국 정부는 달러 위기가 전이되는 것을 차단하는 데 정책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3월 8일 SVB 인출 사태가 발생한 이후 4월 10일까지 한 달 여 동안 10년 만기 국채수익률 변화를 살펴보면 각국의 대응 양상이 보인다. 미국, 독일, 스위스 등 은행 위기 징후를 겪은 나라들의 국채 금리는 10% 이상 떨어졌다. 각국 정부가 나서 국채를 사들이면서 금리를 낮추고 국채 값을 올린 결과다. 반면 멕시코, 브라질 등 신흥국들의 국채 금리 하락폭은 5% 안팎으로 선진국들과 대조를 이뤘다. 아직 달러의 위기에 따른 파장이 신흥국까지 확산되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달러 위기의 불똥이 언제 어떤 나라로 튈지 예상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글로벌 금융 시장은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을 안고 있는 것처럼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2008년과 달라진 세계 경제 상황과 달러 패권에 의지해 경제위기를 해결하려는 미국식 해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주목된다.

[노영우 국제경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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