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판' 레디메이드 인생…빈일자리 21만개? '룸펜'은 웁니다[세종백블]

2023. 4. 12. 15:4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소설 〈레디메이드 인생〉 中
개밥의 도토리다. 인텔리가 아니 되었으면 차라리 노동자가 되었을 것인데 인텔리인지라 그 속에는 들어갔다가도 도로 달아나오는 것이 99퍼센트다. 그 나머지는 모두 어깨가 축 처진 무직 인텔리요, 무기력한 문화 예비군 속에서 푸른 한숨만 쉬는 초상집의 주인 없는 개들이다. 레디메이드 인생이다.

[헤럴드경제=김용훈 기자] 1934년 발표된 채만식 소설 〈레디메이드 인생〉의 주인공 P는 취업청탁을 거절 당한 후 저렇게 읊조린다. P는 당대 일본에서 대학교육까지 받은 인텔리지만 취직을 못하고 떠돈다. 잘 아는 신문사 사장에게 일자리를 청탁했지만, 거절을 당한다. “거참 큰일들 났어. 저렇게 좋은 청년들이 일거리가 없어서 저렇게 애를 쓰니.” 그 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89년이 지났지만 2023년 대한민국에도 레디메이드 인생의 주인공 ‘P’들이 넘쳐난다. 지난 2월 비경제활동인구(취업자나 실업자가 아닌 인구) 가운데 활동상태를 ‘쉬었음’이라고 답한 청년층은 49만7000명이다. 2003년 1월 통계 작성 이래 가장 큰 규모다. ‘쉬었음’은 구직도 취업 준비도 하지 않고 말 그대로 쉬었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취업포기자’다.

룸펜은 말한다, “뭐 어디 빈자리가 있어야지”
취업준비생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이들은 왜 쉬고 있을까. 통계청의 작년 8월 조사를 보면, ‘몸이 좋지 않아서’(39.4%)가 가장 많고 ‘원하는 일자리·일거리를 찾기 어려워서(18.1%)’가 두 번째다. 하지만 이는 ‘쉬었음’ 인구의 43.6%를 차지하는 60세 이상이 포함된 전 연령 조사결과다. 청년층만 보면 ‘원하는 일자리를 찾기 어려워서’란 응답이 가장 많을 것이란 게 통계청 추측이다.

취업포기자가 늘면서 청년층(15~29세) 취업자는 줄고 있다. 3월에도 전년보다 8만9000명 줄었다. 지난해 11월 이후 벌써 5개월 연속 감소했다. 하지만 산업계는 일 할 사람이 없다고 하소연한다. 실제 현재 비어 있거나 1개월 안에 새로 채용될 수 있는 일자리를 뜻하는 빈 일자리는 2월 21만개에 달한다. ‘일자리 미스매치’는 고질병이 됐다.

P의 독백처럼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모를까 배움에 걸맞는 일자리에 취직을 해야 하는데 그런 일자리는 좀처럼 늘지 않는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 중 고등교육 이수율이 가장 높다. 일본(61.5%), 미국(51.9%), 독일(34.9%)도 못 따라온다. 2013년부터 7년간 대졸자는 연평균 3.0% 늘었다. 하지만 고학력 일자리는 1.3% 늘었다.

‘고학력자’들이 일할 곳이 없다보니 우리나라 대졸 청년 고용률은 75.2%로 OECD 38개국 중 31위 수준이다. 일할 능력은 있어도 일할 의사가 없거나 아예 일할 능력이 없는 비경제활동인구 가운데 청년 대졸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20.3%로 OECD 국가 중 세 번째로 높다. 지난해 이들의 활동을 보면 열에 셋은 그나마 취업준비생이고, 둘은 ‘그냥 쉬었다’.

이러다보니 ‘전공’은 중요한 게 아니다. 작년 5월 통계청 조사를 보면, 우리나라 취업자의 52.3%는 전공과 일치하지 않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이 비율이 우리처럼 높은 나라는 드물다. OECD 조사를 보면 대졸(25~34세) 임금 근로자 중 최종 전공과 현재 직업 간 연계성이 없는 비중에서 한국은 50.0%를 기록했다. 독일(26.4%)의 두 배에 육박한다.

지원금 100만원에 대졸이 조선소 갈까?

소설 레디메이드 인생의 주인공 P는 결국 자신의 어린 아들을 인쇄소에 맡긴다. “내가 학교 공부를 해본 나머지 그게 못쓰겠으니까 자식은 딴 공부시키겠다는 것이지요.” 이게 바로 P가 아들을 인쇄소에 맡긴 이유다. 빈일자리가 21만개나 있어도 ‘배운’ 자신은 공장에선 일을 못하니, 아들은 밥벌이를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이다.

유최안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이 19일 오후 경남 거제시 아주동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독(도크) 화물창 바닥에 스스로 용접한 가로, 세로, 높이 각 1m 철 구조물 안에서 농성하고 있다. [연합]

일자리 미스매치를 해결하고자 하는 정부가 국민들에게 원하는 ‘태도’가 이런 것일까. 정부는 지난 3월 올해 1만4000명의 생산인력이 부족한 것으로 예상되는 조선업에 대해 ‘조선업 일자리도약 장려금’을 신설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최저임금 120%이상 지급하는 업체에 정부가 채용장려금을 월 100만원씩 1년간 지원하는 것이다.

일자리 미스매치 해소안을 발표한 지 1개월 남짓 지난 탓에 아직 정책 효과를 언급할 수 없다는 게 정부 입장이지만, 성공을 점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저 장려금을 받고 조선소 하청업체에 들어간다고 치면 1년 간 ‘최저임금의 120%+100만원’ 가량의 임금을 받는다. 1년 후엔 ‘최저임금의 120%’만 받는다. 좋은 일자리도 아니고, 미래도 꿈꿀 수 없다.

고학력자를 조선소에 보내는 건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대신 정부는 외국인을 들여오고 있다. 3월 외국인 고용보험 가입자는 작년 3월보다 무려 10만명 늘어난 15만4000명이다. 국내 인력을 구하지 못한 중소기업이 정부로부터 허가받아 외국인력을 고용할 수 있도록 한 고용허가제 덕분이다. 올해 고용허가제 인원은 11만명으로 역대 최대 규모다.

고용노동부 고용정책담당자가 채만식 소설 〈레디메이드 인생〉을 다시 한번 읽어봤으면 한다. 소설 속에서 P의 아들을 맡게 된 인쇄소 주인은 P에게 이렇게 말한다. “거 참 모를 일이요. 우리 같은 놈은 이 짓을 해 가면서도 자식을 공부시키느라고 애를 쓰는데 되려 공부시킬 줄 아는 양반이 보통학교도 아니 마친 자제를 공장엘 보내요?”

※[세종백블]은 세종 상주 기자가 정부에서 발표한 정책에 대한 백브리핑(비공식 브리핑)은 물론, 정책의 행간에 담긴 의미, 관가의 뒷이야기를 전하는 연재물입니다. 정책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공무원들의 소소한 소식까지 전함으로써 독자에게 재미와 정보를 동시에 전달합니다.

fact0514@heraldcorp.com

Copyright © 헤럴드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