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영화 같은 고전 연극 ‘파우스트’, 악마 박해수가 유혹한다
악마 ‘메피스토’가 ‘신’에게 내기를 제안한다. 메피스토는 존경받는 대학자 ‘파우스트’를 유혹해 신을 떠나게 할 것이라고 장담한다. 늙은 파우스트는 인간의 모든 학문을 통달했지만 지식의 무의미함에 괴로워하는 인물이다. 메피스토는 파우스트에게 접근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쾌락과 그의 영혼을 맞바꾸는 계약을 맺는다. 파우스트는 마녀의 묘약을 먹고 젊어져 아름다운 ‘그레첸’과 사랑에 빠지지만 메피스토는 이들을 파멸로 이끌어간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고전 희곡을 재해석한 연극 <파우스트>가 막을 올렸다. 괴테가 평생을 바쳐 인간 문명의 온갖 신화, 우화, 상징과 은유 등을 집대성한 대작이다. 원작은 1·2부로 나뉘는 방대한 분량인데, 연극은 1부 내용을 공연시간 165분에 압축해 담았다.
제목은 ‘파우스트’지만 악마 메피스토가 주로 극을 이끌어간다. 성경은 악마를 뱀에 비유한다. 배우 박해수는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고 몸을 꿈틀거리며 메피스토의 음흉한 모습을 표현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두 팔을 휘저으며 익살을 보여주다 섬뜩한 표정으로 돌변한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수리남> <슬기로운 감빵생활> 등으로 유명해진 박해수는 이 작품으로 5년 만에 연극 무대에 복귀했다.
박해수는 지난 6일 기자들과 만나 복귀작으로 <파우스트>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배우로서 메시지가 있는 작품에 욕심이 있었는데 때맞춰 이 작품이 왔다”고 말했다. “악의 시초는 무엇이고 어떻게 악이 되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죠. 메피스토가 ‘즐기라’고 유혹하는 말들은 주변에서 쉽게 듣는 익숙한 말들이라 묘하게 느껴졌어요. 선악의 구분이 점점 모호해지는 세상을 살다보니 더 공감이 갔어요.”
유인촌은 1996년 자신이 제작한 연극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를 연기한 뒤 27년이 지나 늙은 파우스트 역으로 돌아왔다. 생기를 잃은 눈으로 삶의 환멸감에 진저리치는 독백 연기가 일품이다. ‘대학로의 아이돌’이라고 불리는 박은석도 젊은 파우스트를 안정적으로 연기했다. 그레첸 역을 맡은 원진아는 이 작품으로 첫 연극 연기에 도전했다. 처음에는 표정이 다소 밋밋했지만 점점 감정을 끌어올려 마지막 감옥 장면에선 갈가리 찢겨진 그레첸의 내면을 폭포처럼 쏟아냈다.
양정웅 연출은 고전 희곡을 현대적 감각에 맞춰 재해석하는 능력으로 유명하다. 무대의 배경으로 대형 발광다이오드(LED) 패널을 설치해 적극 활용한다. 메피스토가 신에게 내기를 제안하는 첫 장면에선 스탠리 큐브릭의 SF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닮은 배경 화면을 띄웠다. 신의 몸은 흰색 정장에 비닐 외투를 입고선 관절을 비틀며 춤을 추는데, 신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묵직하게 울려퍼지는 연출은 일견 우스우면서도 묘한 경외감을 준다. 무대 뒤편에 마련한 그레첸의 방에서 연기하는 원진아의 모습을 LED 화면에 동시 송출해 무대 위 박은석과 대사를 주고받기도 한다.
고전 희곡 특유의 미사여구 가득한 운문 형식 대사가 해일처럼 밀려온다. 괴테가 쓴 대사의 운율을 충실히 살렸지만 관객이 집중력을 잃으면 극의 전개를 이해하기 어렵다. 엄청난 대사량에 압도당해 당황할 수도 있다.
관객의 눈을 붙잡기 위해 양정웅 연출은 SF영화가 연상되는 초현실적 무대를 구현했다. 수많은 인간 군상이 등장하는 ‘발푸르기스의 밤’ 장면에선 새빨간 조명을 사방으로 비추고 천장에 달린 12개의 선풍기를 작동시켜 타락과 욕망이 날뛰는 광기의 축제를 그려냈다. 배우들이 객석을 앞뒤로 가로지르며 대사를 주고받아 관객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연극이 끝났을 때처럼 아예 객석 전체를 환하게 밝히기도 했다. 박해수가 드라마 <수리남>에서 가져온 대사 “식사는 잡쉈어?” 같은 웃음 포인트도 곳곳에 있다.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서울에서 오는 29일까지 공연한다. R석 9만9000원, S석 7만7000원, A석 4만4000원이다.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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