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이 활활 타오르는 때는 바로 지금!
안도현 시인의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란 시 구절이 차디찬 내 심장에 일갈한다. 나도 한때 활활 타오르며 밀어붙이던 뜨거운 청춘이 있었다. 당시 나를 열광케 했던 이들을 최근 다시 만났다. 속 빈 강정 같던 내 속에 다시 불꽃이 튄다. 30여 년 전 쿵쾅거리는 심장의 쫄깃함이 전해진다.
재가 될지언정 뜨거웠던 시절로
팬데믹 미로 속에서 겨우 빠져나온 올해,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중요하다. 정의롭고 시의적 영화보다는 변치 않는 보편적 진리와 진정한 사랑을 논하는 명작에 눈길이 쏠린다. 코로나19로 인한 소비 패턴과 콘텐츠 플랫폼 변화가 관객에게 영향을 끼쳤다. 이제 팝콘의 달콤함보다는 한 번뿐인 인생을 더 행복하게 만들 벅찬 스토리에 환호한다. 알려진 콘텐츠라도 상관없다. 이미 극장가는 리마스터링 재개봉 명작 영화에 익숙해졌다. 가슴 울리는 명작은 영화, 게임, 음반, 애니메이션, 캐릭터 상품, 장난감, 출판 등 다양한 방식으로 부가가치를 극대화한다. 명작 리마스터링은 일거양득이 아닐 수 없다.1990년대 대한민국에 농구 열풍을 일으켰던 인기 만화 원작의 애니메이션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1월 4일 개봉됐다. '이미 한물간 만화로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몇 달째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지키고 있다. 원작 '슬램덩크'가 한국에 처음 소개된 1992년 한국 농구계는 남성뿐 아니라 10대 여성 팬덤으로 들썩이고 있었다. 운동선수에게 연예인급 팬덤이 처음 형성된 종목도 농구일 것이다. 대학 농구의 최고 전성시대로 당시에는 운동선수를 만나기 위해 같은 대학을 가려는 여학생이 꽤 있었다.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기 힘들다
슬램덩크가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드라마였다면 이렇게 인기를 몰 수 있을까? 추억의 타임머신 같은 효과는 맛볼 수 없었을 거다. 당시 인기를 몰던 영화나 TV드라마를 지금 관람한다면 구성, 화질 때문만 아니라 어색한 패션, 헤어, 소품, 배경 탓에 몰입하기 힘들어진다. 하지만 만화는 아니다. 만화는 유행을 타지 않고 질리지 않는다. 언제나 그 시절 그대로다. '들장미 소녀 캔디'의 테리우스는 여전히 '꽃미남'을 대표하고, 이원복 교수는 여전히 '먼 나라 이웃나라'를 여행한다. 만화의 이미지는 은연중 한번 각인돼 버리면 퇴색될지언정 변질되지는 않는다. 만화로 체감한 감성은 세월이 흘러도 처음 느낌 그대로 되살아난다. 만화는 인간의 사상, 감정이나 사회현상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원초적 이미지 언어다. 첨단무기가 오가는 포연이 가득한 전쟁터에서조차 심리전 일환으로 만화가 활용되는 이유다.일찍이 호황을 누린 일본 만화계는 다른 나라와 달리 한정된 독자에 의존하지 않았다. 탄탄한 해외 수출 네트워크 시장구조를 구축한 덕분에 인기리에 연재된 일본 만화는 TV애니메이션으로 직행했다. 1984년 '드래곤볼'이라는 공전의 히트작이 연재되면서 일본 만화계는 신인 발굴에 더욱 힘을 쏟아 공모전 같은 등용문을 넓혔다. 만화잡지는 작화뿐 아니라 내용과 연출까지 철저하게 관리해 높은 퀄리티로 탄탄한 독자층을 확보했다. 초기 투자 자본이 상대적으로 덜 드는 만화는 애니메이션, 게임, 영화, 음악, TV드라마 등 부가 콘텐츠를 양산하는 '황금 알을 낳는 거위' 같은 고효율 산업으로 발전했다. 일본은 '슬램덩크' 외에도 '명탐정 코난' '소년 탐정 김전일' 등 만화-TV 애니메이션-게임으로 이어지는 콘텐츠를 전 세계에 수출했다.
농구는 5명이 한 팀이 돼 바스켓에 골을 넣어 점수를 많이 내는 팀이 이기는 경기다. 5명은 역할을 분담해 자리를 잡고 골대 위 바구니에 공을 넣어야 하고, 상대편 5명은 이를 필사적으로 저지해야 이긴다. 골대를 맞고 튕겨 나온 골을 잡으려는 결사항전이 벌어진다. 손, 팔과 다리, 온몸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신장, 팔길이, 손 크기 같은 신체 조건과 스피드, 민첩성, 힘, 점프력, 지구력 같은 운동능력이 동시에 중요시된다. 어느 구기종목보다 체력 소모가 상당한 운동으로 팀워크가 매우 중요하다. 농구코트를 누비는 선수 10명은 신장도, 기량도, 성격도 모두 제 각각이지만 농구에 대한 진심으로 관객을 감동시킨다.
어차피 모두가 주인공
만화책에서 이야기의 중심은 강백호지만, 영화는 원작 주전 선수 중에서 가장 비중이 낮았던 2학년 송태섭에 초점을 맞춘다. 원작은 도쿄에서 기차로 1시간 10분 정도 떨어진 가마쿠라시(市)의 북산고등학교로 설정돼 있는데, 영화는 오키나와에 사는 초등학생 송태섭으로 시작한다. 오키나와는 일본보다 대만에 더 가까운 일본 최남단 섬이다. 원래는 자치 왕국이었지만 1879년 일본에 편입된다. 1945년 4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은 본토 상륙을 최대한 저지하기 위해 오키나와에서 절체절명 사수 작전을 폈다. 형과의 추억이 깃든 송태섭 아지트는 태평양전쟁 당시 오키나와 해안의 인공 동굴 방공호가 연상되기도 한다.
오키나와는 전쟁 후 미국군정부가 세워져 미국 정부의 통치를 받는다. 일본 정부에 반환되는 1972년까지 오키나와는 미군으로부터 미국 문화를 흡수한다. 미국 빈민가 좁은 골목에는 간단히 골대 밑에서 농구를 즐기는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오키나와에는 특별한 장비 없이도 시작할 수 있는 가장 미국적인 운동인 농구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혔다. 감독은 극적 사실감을 부여하기 위해 송태섭 목소리를 오키나와 출신 성우에게 맡겼다. 아버지에 이은 형의 죽음 이후 송태섭 가족이 이사한 곳이 바로 북산고교가 위치한 가마쿠라시(市)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담담하게 상실, 단절, 결핍 등을 극복하는 송태섭의 서사에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만화책 '슬램덩크'의 작가이자 이번 영화의 감독을 맡은 이노우에 다케이코(55)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소질이 다분했지만 검도부와 농구부에서 학창 생활을 보냈다. 농구부는 그가 고등학교 때 감흥 없이 우연히 가입한 동아리였다. 실력이 단기간에 일취월장한 그는 168cm의 단신이라는 단점을 스피드로 극복해 빠른 드리블과 속공으로 상대의 허를 찔렀다. 발군의 포인트 가드로 맹활약하며 주장까지 올라 팀을 이끌었다. 고교 농구부의 이노우에는 송태섭과 같은 포지션으로 극 중 송태섭과 같은 장단점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하지만 농구선수로는 딱 거기까지. 이노우에는 대학이나 프로팀으로 스카우트될 실력은 아니었기에 만화가가 되기 위해 일찌감치 미대로 진로를 정했다.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으로 미대를 포기하고 지역 국립대학인 구마모토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이는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일 뿐 꿈을 접지는 않았다. 문학도답게 부지런히 스토리를 구상하고 이를 만화로 그려 만화잡지 '소년 챔프' 공모에 투고했다. 드로잉을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어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이를 계기로 '시티 헌터' '엔젤 하트'를 그린 호조 쓰카사(63)의 문하생이 되는 기회를 얻는다. 단박에 대학을 그만두고 짐을 싸서 도쿄로 향한다.그림에 초보였던 그는 호조의 그림체를 빠르게 습득해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탄생시킨다. 만화의 캐릭터는 비슷할지라도 각도와 색채, 포즈에 따라서 전혀 다른 캐릭터로 변신한다. 이노우에의 만화는 진지한 장면에서는 극화체로 치밀하게 이어가지만 뒤이어 귀여운 표정의 개그 컷이 함께 나온다. 이는 원래 스승인 호조의 전개 방식이었지만 이제는 이노우에 스타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이번 영화에서는 그의 주특기 개그 컷이 거의 빠졌다. 이유는 만화책이라면 칸을 나누어 '깨알개그'를 넣어도 독자가 바로 이해하지만 영화는 스크린 사이즈가 일정해 '개그 코드'가 '다큐 코드'가 되는 위험이 도사리기 때문.
10개월 만에 단편으로 지면에 데뷔한 이노우에는 2년 후 연재를 시작한다. 상경 3년째 되던 해 연재한 두 번째 작품이 바로 '슬램덩크'다. 농구 스텝을 밟는 느낌, 패스 받는 신체 반응, 슛의 순간 타이밍 등 몸으로 기억하는 농구를 만화로 담았다. 독자는 마치 자신이 농구를 하는 것처럼 빠져들었다. 한 컷을 위해 셀 수 없이 많은 컷을 그리고 또 그렸기 때문이다. 항상 초보라는 생각으로 무언가 시도하고 실패해도 다시 도전하는 불굴의 의지가 그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그의 성공의 견인차는 역시 '중꺽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였다!
만화는 만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독자의 애간장을 녹이며 연재됐건만 극 중 시간은 겨우 4개월이다. 이래저래 주인공들은 영원불변 고등학생으로 남는다. 현실의 높은 벽에 결국 그들은 우승 트로피를 차지하지 못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이들에게는 도전이란 무기가 있으니 괜찮다.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개봉 57일 차인 3월 2일 현재 누적 관객 372만 명으로 박스오피스 4위를 차지하고 있다. 사흘 전엔 2위였다. 순위와 상관없이 두 달 가까이 극장에 걸려 있는 것만도 놀라운 일이다. 과거의 향수를 그리워하는 30~40대 관객만 있는 건 아니다. 20대 예매 비율도 24.6%(2월 18일 CGV)에 달한다. 시간이 흘러 '더 세컨트 슬램덩크'가 탄생한다면 새로운 20대와 중장년 세대가 함께 진한 여운을 간직하려 극장을 다시 찾지 않을까 싶다.
황승경
● 1976년 서울 출생
● 이탈리아 레피체국립음악원 디플럼,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성균관대 공연예술학 박사
● 국제오페라단 단장
● 前 이탈리아 노베 방송국 리포터, 월간 '영카페' 편집장
● 저서 : '3S 보컬트레이닝' '무한한 상상과 놀이의 변주' 外
황승경 공연칼럼니스트·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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