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honey] 아슬랑아슬랑, 청산도 나그네
(완도=연합뉴스) 진성철 기자 = 영화 '서편제'를 촬영한 서편제길, 옛 모습 그대로인 마을 돌담, 청산도에서만 볼 수 있는 구들장논, 드넓은 모래 해수욕장에 밀려드는 파도.
나그네를 느릿느릿 걷게 하는 청산도의 풍경들이다. 아슬랑아슬랑, 청산도를 걷다 보면 마음도 느긋해진다.
슬로시티, 슬로길 청산도
전남 완도에서 차도선으로 50여분 바다를 건너면 청산도에 닿는다. 청산도항에 내리면 슬로시티를 상징하는 달팽이 모형과 그림이 곳곳에 보인다.
국제슬로시티연맹에서는 2007년 신안군 증도, 담양군 창평면, 장흥군 유치면과 함께 청산도를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Slow City)로 선정했다. 슬로시티는 전통을 보존하고 자연에 맞춰 살아가려는 '느림의 가치'를 지켜가는 지역을 말한다.
청산도에서 머문 펜션의 주인은 도시에서 10여년 전 내려왔다고 했다. 그리고 "청산도에 살면 절로 자연에 맞춰 살 수밖에 없다"고 얘기했다.
청산도에는 국제슬로시티연맹에서 인증한 세계 최초의 슬로길도 있다. 옛날부터 마을 사람들이 걸어 다녔던 길이다. 이제는 청산도를 찾는 나그네들도 많이 걷는다. 서편제길, 화랑포길, 사랑길, 범바위길, 구들장길, 돌담길 등 11개 코스 17개의 길로 총길이는 42.195㎞다.
변한 듯 그대로인 듯…당리마을 서편제길
서편제길은 한국 영화 최초로 1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서편제'를 촬영한 곳이다. 당리 마을 언덕에 있다.
임권택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은 1992년 11월 18일 오전, 이 길에서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신 41번을 촬영했다. 5분 40초 롱테이크로 찍었다. 판소리꾼인 아버지 유봉과 딸 송화, 아들 동호가 밭을 둘러싼 돌담 사이 길을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걷는 장면이다. 임 감독은 손아래 동서의 소개로 청산도를 운 좋게 찾았다고 밝힌 바 있다.
카메라를 들고 언덕진 서편제길을 천천히 걸었다.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길 그대로 남아있을까 궁금했다.
다양한 높이의 돌담이 밭을 둘러싸고 있었다. 돌담은 쭉 뻗어있기도 하고 휘어져 있기도 했다. 예전에 황톳길이었던 돌담 밭 사이 길은 엷은 분홍색이 섞인 시멘트 포장길로 변했다.
돌담 안은 유채밭이다. 푸른 유채는 아직 어렸다. 유채꽃이 활짝 피고 슬로길 축제가 열리는 4월이 되려면 아직 한 달 정도 남았다.
언덕배기에 있는 드라마 '봄의 왈츠' 촬영 세트장, 비탈진 언덕을 따라 있는 유채와 배추밭, 그리고 언덕 아래 바다를 보며 길을 어슬렁거렸다.
서편제길은 예전과 같은 듯하면서도 달랐다. 유채밭에서 잡풀을 솎아내고 있던 청산도 주민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분들 중 청산도에서 나고 자라고 서편제 영화 촬영을 지켜봤던 최 씨 어르신이 당시 카메라가 놓였던 곳을 손짓으로 가르쳐 주었다. 그러면서 최 씨는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서울 종로에서 왔다고 말했더니 "종로에서 이발관 하는 박 아무개 씨를 아냐"고 되물어 당황스러웠다.
최 씨가 알려준 곳은 서편제 촬영지 안내판의 바로 옆이었다. 스마트폰에 저장해 둔 신 41번과 서편제길을 비교하며 살펴보았다.
신 41번에서 배우들이 언덕을 걸어 내려오기 시작했던 돌담길은 살짝 옹이진 모양 그대로다. 그 길은 장면의 중간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이어진다. 마지막에 덩실덩실 춤을 추는 무대가 되는 길 끝의 돌담도 비슷했다.
변한 건 장면의 왼쪽 위였다. 30년 동안 훌쩍 자란 소나무들이 언덕 너머에 있는 밭들을 가려버린 탓이었다.
청산도에 머무는 동안 여러 번 서편제길을 찾았다. 한낮에는 시멘트 길이 너무 밝게 빛나 돌담 밭과 어울리지 않았다.
해 질 무렵이 좋았다. 노을이 지는 동안 돌담, 비탈진 언덕의 밭과 사이의 길들, 군데군데 섞여 있는 무덤들이 노랗게 변했다. 언덕 아래 바다는 노랗게 물들었다 붉어졌다.
유채밭에서 지심을 매던 할머니들은 서편제길에는 4∼5월에는 유채꽃이,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만발한다고 귀띔했다. 그리고 맞은 편 청산진성 옆 밭에는 양귀비꽃이 5월에 예쁘다고 알려주었다.
당리마을에는 흙돌담과 낡은 초가집의 서편제 촬영 세트장도 있다. 판소리를 배우는 어린 송화와 동호, 그리고 유봉을 재현해 두었다.
미항길-동구정길-서편제길-화랑포길로 이어지는 슬로길 1코스에 있다.
옛 정취 그대로… 청산도 돌담길과 구들장논
당리마을 서편제길에서 청산로를 따라 동쪽으로 넘어가면 마을 돌담이 옛날 그대로인 상서리와 동촌리가 나온다.
이 마을의 돌담은 오로지 돌로만 쌓은 '강담'이다. 집을 둘러싼 돌담은 어깨보다 조금 높게 쌓았다. 느릿느릿 걷기 좋은 미로 같은 돌담길이다.
상서리 돌담길에 들어서니 담보다 조금 높은 지붕에서 봄볕을 쬐던 고양이가 놀란 눈으로 나그네를 주시했다.
밭과 집 사이 언덕길에서는 삐약삐약 소리가 들렸다. 병아리 네 마리가 주인아저씨를 어미인 양 졸졸 따라다녔다. 병아리들은 보리밭에서 뛰며 놀았다.
청산도에는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구들장논이 있다. 구들장논은 경사진 땅에 돌을 구들을 놓듯 석축을 쌓고 흙을 메워 만든 논이다. 얼핏 보면 그냥 다랑논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석축 사이에 만든 통수로가 보인다.
구들장논은 국가중요농업유산 1호이자 국내 최초로 2014년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에서 주관하는 세계중요농업유산에도 등재됐다. 16~17세기 무렵 청산도에 정착한 사람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청산도 여러 마을과 들에서 볼 수 있다. 부흥리, 영흥리에는 구들장논 체험장도 있다. 특히 상서리 마을의 구들장논에는 6~7월이면 긴꼬리 투구새우가 논에서 헤엄친다고 한다. 이 새우는 고생대 이후 거의 진화하지 않은 살아있는 화석이다.
상서리 옆인 동촌리 또한 돌담길이 정겨운 동네다. 동촌리 돌담길을 어슬렁거리니 이번에서 꺼억꺼억 큰 소리가 났다.
돌담을 넘어 보니 거위들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동네 가운데 돌담으로 둘린 밭에는 청보리가 자라고 있었다.
상서리, 동촌리의 돌담길은 목섬과 새목아지로 가는 들국화길로 이어진다.
새목아지는 바다로 뻗어나간 곳이 새의 목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아침에는 거문도 쪽에서 뜨는 해가 멋지고, 우럭, 농어, 돌돔 등 낚시가 잘되는 포인트라고 펜션 주인은 말했다.
새목아지를 다녀오는 동안 만난 나그네들은 서로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주고받았다.
돌담길, 들국화길은 7코스에 있다.
드넓은 해변을 채워주는 파도…신흥리 해수욕장
상서리, 동촌리 맞은 편이 신흥리다. 신흥리 앞바다인 신흥해수욕장은 멍하니 파도를 지켜보기에 근사한 해변이다. 'ㄷ'자 형태로 형성된 해수욕장은 썰물 때면 2㎞가 넘는 모래 해변과 갯벌이 드러난다.
해 뜰 무렵 신흥리에서 상산포로 가는 갈림길이 있는 언덕에 섰다.
해는 건너편 목섬 쪽에서 떠올랐다. 일출에 맞춰 바닷물도 들기 시작했다.
파도가 결이 진 모래사장 위로 밀려들었다. 잔잔한 파도는 켜켜이 층을 쌓듯 여러 겹으로 밀려들었다 빠져나갔다. 분홍빛 바닷물이 회색빛 모래 해변을 서서히 채워갔다. 바닷물이 신흥리 마을 앞까지 차오르자 오리도 돌아와 어선들 옆에서 노닐었다.
여름에 이곳을 찾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듯했다. 모래등에 두 다리를 펴고 앉아 발바닥부터 발목, 무릎, 허리까지. 몸을 적셔오는 파도를 느긋하게 즐길 상상을 하니 마음이 왠지 모르게 들떴다.
청산도에 있는 동안 신흥리 언덕에 있는 펜션에서 묵었다. 낮에 잠시 쉬려 숙소에 들르다 보니 한 아주머니가 돌담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2시간 정도 지난 뒤 숙소를 나서는데 아주머니가 여전히 흙밭에서 호미로 잔돌을 골라내고 있다. 아주머니는 묵혀 두었던 땅에 올해는 고추를 심을 거라고 말했다.
신흥리 해수욕장은 해맞이길이 시작되는 8코스에 있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3년 4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zj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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