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후 망언’ 대신 ‘화해와 협력’으로
“오부치 총리대신은 (중략)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중략) 화해와 선린우호 협력에 입각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서로 노력하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라는 뜻을 표명했다.”
1998년 10월 한·일 정상이 합의한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김대중·오부치 선언)’의 한 구절이다. 이 대목 때문에 김대중·오부치 선언이 한·일 관계의 해법을 제시했다고 평가받았다. ‘반성과 사죄’ ‘화해와 협력’은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로 가는 수레의 두 바퀴다. 한·일 관계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갈등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해법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한·일 정상회담 이후 열린 국무회의 모두 연설에서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강조했다. 하지만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지난 한·일 정상회담에서도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에둘러서 언급했을 뿐이다.
일본의 역대 내각은 그동안 일본이 충분히 사과했으나 한국 국민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대표적 인물이 아베 신조 전 총리다. 아베는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에 더 이상 사과는 없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베는 도리어 한국을 향해 “골대를 옮기면 안 된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한 것은 비단 김대중 대통령만이 아니다. 김영삼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도 취임 직후부터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조처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 역대 내각이 사과한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들은 일본이 ‘진정한 사과’를 하지 않았다고 여긴다. 사과 후 일본 총리나 내각의 고위급 인사들이 매번 사과를 부정하는 망언을 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50차례 넘게 사과했다면, 그 후 50차례가 넘게 사과를 무색하게 하는 망언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마치 ‘사과 후 망언’이라는 법칙이라도 있는 듯하다.
김영삼 대통령 임기 초반 한·일 관계는 순조롭게 발전하는 듯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당시 한·일 관계에서 핵심 이슈로 등장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에 금전적인 요구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정부가 국고로 생존자들을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또 일본 방문에 앞서 방문 목적을 “기본적으로 과거에 발이 묶이지 않는 새로운 미래의 구축”이라고 말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이러한 조치나 발언이 윤석열 정부와 비슷해 보이지만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바로 일본의 사과다.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가 과거사에 대해 반성을 표명했다. 1995년 8월에는 식민지 강점에 대한 사과를 담은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의 사과 담화도 이어졌다.
반복되는 ‘사과 후 망언’ 법칙
하지만 그뿐이었다. 무라야마 담화의 주인공인 무라야마 총리가 담화 두 달 만에 ‘한·일 합방조약은 당시 국제법상으로 유효하다’는 발언을 했다. 개선되는 듯했던 한·일 관계에 찬물을 끼얹는 망언이었다. 한국 국민들이 가장 분노했던 것은 당시 에토 다카미 총무청 장관의 발언이었다. 그는 일제의 식민지 강점은 “(조선이) 나라의 힘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단행된 것이었다. 일본이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고, 창씨개명도 강제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이때 김영삼 대통령은 ‘버르장머리 발언’으로 받아쳤다. “이번 망언까지 합하면 30번도 넘을 것이다. 따라서 이번에는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라는 초강경 발언을 한 것이다.
이후 한·일 관계는 냉각기를 거쳤다. 3년 가까이 지나서야 김대중·오부치 선언으로 다시 화해와 협력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또다시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하는 일본의 행위가 이어졌다. 김대중·오부치 선언 이후인 2001년 일본 내각은 보수 출판사인 후소샤의 역사 왜곡 교과서 검정을 통과시켰다. 우리 국민들은 다시 경악했다. 오부치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총리에 취임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매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2002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 분위기에 맞춰 화해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월드컵 이후 다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면서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빛바래게 만들었다.
이런 패턴은 노무현 대통령 시기에도 어김없이 반복됐다. 노무현 대통령도 취임 초반부터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취임 후 한·일 정상 사이 ‘셔틀 외교’를 진행했고, 민간 차원의 인적 교류도 활발해졌다. 문제는 일본 내각이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이러한 분위기에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했다. 내각 차원에서 교과서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왜곡 기술하게 하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2005년에는 일본 시마네현에서 2월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제정하고, 일본 정부도 외교 청서에 독도 영유권을 게재하기 시작했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유명한 독도 연설도 이런 한·일 관계가 배경이다. 지난 2월22일에도 일본의 지방정부가 주최하는 이 행사에 2013년부터 11년 연속으로 일본 내각의 차관급 인사가 참석했다.
일본 문부과학성은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역사 왜곡을 기술한 교과서 검정을 통과시키고 있으며, 해마다 외교 청서에서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주장해오고 있다. 일본은 3월이나 4월에 교과서 검정을 승인한다. 이번 한·일 정상회담 이후에도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강제동원을 부인하는 교과서 검정을 승인했다. 곧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하는 외교 청서도 발표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본과 화해를 위한 대승적 결단을 내렸다지만, 일본은 이 같은 행위를 올해도 되풀이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 때도 일본은 표리부동한 태도를 보였다. 일본 내각은 2019년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조처를 하면서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대항 조치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직하지 못한 태도다. 이에 맞서 한국 정부가 한·일 군사정보 보호협정인 지소미아(GSOMIA) 철회를 추진할 때 “지소미아와 수출 관리는 별개”라는 것이 일본 내각이 표명한 입장이었다. “한국 측이 현명한 대응을 하길 바란다”라고 압박하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일본 내각은 ‘내로남불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의 한·일 관계
이명박·박근혜 두 정부 시절 한·일 관계는 다른 정부와 차이점이 있다. 일본 내각의 정직하지 못한 태도는 변함없었다. 무기력했던 한국 정부가 이를 덮어주는 새로운 양상이 등장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취임 초에 한·일 관계 개선을 추진했다. 2008년 4월 일본 방송에 출연해 “과거에 묶여서 미래를 못 나가면 안 되니까 미래를 향해서 나갈 수밖에 없다”라고 했다. 이즈음 일본 〈요미우리신문〉이 이명박 대통령의 ‘기다려달라’는 독도 발언을 보도했다.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2008년 7월 홋카이도에서 열린 G8 정상회의에서 후쿠다 야스오 총리는 ‘중학교 사회과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다케시마를 일본 땅이라고 명기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통보했다. 이에 이명박 대통령이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달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를 적극 부인했지만 2012년 2월 ‘위키리크스’ 폭로로 이 발언이 다시 알려졌다(이명박 대통령이 “기다려달라(hold back)”고 말했다고 주일 미국 대사관이 본국에 보고한 외교 전문이 공개되었다). 이후 이명박 정부는 대일 강경 방침으로 돌아선다. 대통령이 불필요하게 독도를 방문하여 우리 영토인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드는 데 불을 지폈다. 다소 엉뚱하게도 일왕에게 사죄를 촉구하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오락가락 외교로 한·일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일본의 독도 야욕에 대한 정부의 무능한 대응은 한·일 관계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만들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집권 초반부터 대일 강경책을 펼쳤다. 임기 초반부터 한·일 관계 개선을 추진했던 이전 정부와는 다른 출발이다. 취임 후 첫 3·1절 기념사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 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는 것”이라며 “일본은 역사를 직시하고 책임지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버르장머리 발언’ 이후 가장 강력한 대일 발언이었다.
일본 정부는 시나브로 박근혜 정부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5년 9월 열린 중국의 전승절 행사에 참석해서 천안문(톈안먼) 망루에 올랐다. 이후 일본은 한국이 중국에 치우쳤다는 ‘중국경사론’을 유포했다. 미국 조야에도 이 같은 주장이 널리 퍼졌다.
이러한 압력 앞에서 박근혜 정부는 3·1절 연설에서 호기롭게 밝힌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을 포기했다. 2015년 아베 총리는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이라는 점을 들어 당시 쟁점 사안이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 타결을 요구했다. 그해 연말인 12월28일에 한·일 양국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협상을 타결했고, 한국 국민들은 반발했다.
아베는 2015년 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계기로 전범국가에서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 거듭나려 했다. 아베는 세상을 떠났으나, 아베의 꿈은 일본 역대 내각의 입장이 되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기시다 총리가 계승하겠다고 말한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이란 사과 후 이를 부인하는 정직하지 못한 태도에 불과하다. 마치 ‘교’와 ‘활’이라는 전설 속의 동물을 연상하게 할 정도로 앞뒤가 다른 말과 행동을 해왔다. 한·일 정상회담 이후 역사 왜곡 교과서 파동에서 알 수 있듯 일본의 이런 행동은 어김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 국민들은 일본이 사과 후 ‘행동’과 ‘말’로 뒷받침하기를 원한다.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로 가기 위해서다. ‘반성과 사죄’, ‘화해와 협력’이야말로 이 길을 가는 수레에서 하나라도 빼놓을 수 없는 두 개의 바퀴다.
김창수 (전 코리아연구원 원장)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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