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 그늘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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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SF소설을 써본 적이 있다.
공상과학소설(science fiction)이라고 하면 거창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학교 다닐 때 교양과목의 과제물로 낸 것이라 어설프기가 그지없었다.
도서관에서 수많은 SF소설을 빌려 읽은 것도 이 까닭이었다.
세 페이지보다 적게 써내라는 제약이 길게 쓰는 것보다 어려운 줄을 그때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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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SF소설을 써본 적이 있다. 공상과학소설(science fiction)이라고 하면 거창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학교 다닐 때 교양과목의 과제물로 낸 것이라 어설프기가 그지없었다. 그럼에도 그 숙제를 하기 위해 학기 내내 도서관에서 열심히 SF소설을 빌려 읽다가 재미를 붙여 꾸준히 읽게 됐으니, 교수님의 빅픽처는 성공적이라 할 수 있겠다.
내가 수강했던 과목은 일종의 교양 물리학이다. 전공기초과목으로 물리와 화학을 다 배우는 학생인데도, 쿼크라든가 네뷸라 같은 물리용어는 그때 처음 배웠다. 사실 물리를 재밌게 여겨 찾아 듣는 학생은 드물지 않나. 그래서인지 강의 첫날 교수님은 물리학과 학생은 당장 다 나가고 다른 자연계열 학생도 되도록 강의를 양보해 달라고 주문하셨다. 인문계열 학생들은 이번이 아니면 앞으로는 물리강의를 들을 기회가 없다는 것이었다.
교수님의 의의에는 동감했지만 나는 시간표의 효율상 이 과목을 포기하기 힘들었다. 그랬더니 정히 남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 시험과 과제는 인문계열 학생에게 유리하게 낼 것이라고 공언하셨다. 그 중 하나가 SF단편소설 과제였다. 아무래도 자연계 학생이 글짓기는 약한 편이다. 게다가 글씨를 키워서 얼렁뚱땅 분량을 채우지 못하게끔 철저한 기준을 정해 두셨다. 글자체, 글자 크기, 글자 폭, 줄 간격, 문단 간격, 들여쓰기, 여백 주기 등 분량을 조절하지 못하게 묶어놓고 똑같이 3 페이지 이내로 쓰게 하였다. 작성 기준을 어기면 부정행위로 간주하여 0점 처리할 것이며, 기존 소설이나 영화의 내용을 베껴도 0점 처리하겠다고 엄포를 하셨다.
도서관에서 수많은 SF소설을 빌려 읽은 것도 이 까닭이었다. 마치 논문을 쓰기 전에 참고자료를 확인하는 것처럼, 혹시 나도 모르게 부정행위를 하게 될까봐 가능한 많은 책을 읽었다. 나름 준비는 많이 했지만, 내 실력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세 페이지보다 적게 써내라는 제약이 길게 쓰는 것보다 어려운 줄을 그때서야 알았다.
과제를 제출한 후 마지막 수업시간에 교수님은 매우 신난 표정으로 나타나셨다. 이번 학기에도 아주 신선한 내용을 써낸 사람이 있는데 세부설정마저 꼼꼼해서 큰 감명을 받으셨다며 장원글을 읽어주셨다. 강의실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그 글이 너무 훌륭해서가 아니라, 그 신선하다는 설정이 당시에 인기있던 주말 TV외화시리즈와 완전히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자기도 적당히 베껴낼 걸 그랬다는 탄식이 이곳 저곳에서 조그맣게 나왔지만, 교수님은 모르시는 채 수업이 끝났다. 결국 그 많은 제한은 대다수 양심을 지키는 사람을 가두는 데는 성공했지만, 부끄러움을 모르는 용감한 표절자는 걸러내지 못했다.
강의는 교수님의 재량이긴 하지만, 많은 제약을 걸어 두는 대신 학생들이 더 자유롭게 글을 쓰도록 허용하셨다면 어땠을까. 물론 채점하기는 조금 더 어려웠을 수 있지만, 더 다채로운 결과물이 나올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마치 식물처럼 처음 싹이 나기까지는 씨앗을 보호하기 위해 그늘과 울타리가 필요하지만, 어느 정도 자라나고 나면 그늘과 울타리보다는 충분히 많은 햇볕과 성장할 수 있는 여유 공간이 필요하듯이 말이다.
내가 속한 치과의료계에도 정부의 그늘을 이제 조금 거두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부에서 획일적으로 규제하기보다는 세부사정을 잘 알고 각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직능단체와 회원들에게 스스로를 단속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편이 좋다. 그래야 법의 속도로 따라갈 수 없는 편법적인 위험으로부터 치과계의 역할과 국민 건강을 지켜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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