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컷’을 위한 변명, FA 김연경의 고유 권한이자 선택이다

남정훈 2023. 4. 12.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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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컷. 프로 스포츠에서 거물급 선수가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어 이적할 팀 혹은 잔류할 원소속팀의 샐러리캡 사정을 고려해 시장가치보다 몸값을 낮춰 계약하는 것을 이르는 용어다. 커리어에 아직 우승이 없는 스타급 선수가 우승 전력의 팀으로 이적하려고 할 때 샐러리캡 때문에 자신의 시장 가치에 걸맞는 연봉을 받을 수 없을 때 하는 흔히 하는 선택이다. 혹은 평소 친분이 두터운 선수들이 한 팀에 모여 뛰기 위해 연봉 삭감을 선택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지난 10일 서울 용산구 그랜드 하얏트호텔에서 프로배구 2022-2023 V-리그 시상식에서 정규리그 MVP와 베스트7을 수상한 흥국생명 김연경이 기념촬영을 위해 트로피를 들고 있다. 연합뉴스
대표적인 예가 미국 프로농구(NBA)의 ‘킹’ 르브론 제임스다. 르브론은 첫 FA 자격을 얻은 뒤 ‘더 디시젼 쇼’를 통해 “나의 재능을 사우스비치로 가져간다”며 마이애미 히트로 이적할 때 페이컷을 했다. 기존에 히트에서 뛰고 있는 드웨인 웨이드에 토론토 랩터스에서 합류할 크리스 보쉬와 ‘빅3’을 형성하기 위해선 르브론이 제값을 모두 받았다가는 백업 멤버가 형편없어져 우승권 전력을 구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03년 드래프트 동기 3인방’ 르브론과 웨이드, 보쉬가 뭉친 ‘빅3’의 히트는 첫 시즌엔 파이널에서 ‘독일 병정’ 덕 노비츠키가 이끄는 댈러스 매버릭스에게 막혀 준우승에 머물렀으나 2012, 2013 파이널 2연패를 일궈냈다. 르브론으로선 연봉 일정 부분의 손해를 감수하고 그토록 바라던 파이널 우승을 이뤄냈으니 그의 페이컷은 결과적으로 성공한 셈이다. 르브론의 ‘더 디시젼 쇼’에 이은 마이애미행을 두고 ‘헤이터’들은 ‘야합’이라고 폄하했지만, FA라는 선수 권리를 활용해 우승 가능성을 높이는 것을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 폄하는 일시적이지만, 우승이라는 기록은 영원히 남는 법이다.

페이컷에 대한 설명을 이렇게 장황하게 하는 이유가 있다. ‘배구 여제’ 김연경(35)이 지난 10일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열린 V리그 시상식에서 ‘페이컷’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2005~2006시즌 데뷔해 해외리그를 도느라 이제야 V리그 첫 FA 자격을 획득한 그의 입에서 페이컷 단어가 나온 것은 꽤 의미심장에게 들린다.

2022~2023 V리그 시상식에서 만장일치로 정규리그 MVP를 수상한 김연경은 이로써 자신의 MVP 트로피를 5개를 늘렸다. 여자부는 물론 남자부를 통틀어도 레오(3회)보다 2개 많은, 명실상부 V리그 최고 스타임을 입증했다. V리그에서 소화한 시즌이 단 6시즌에 불과한데 5개의 정규리그 MVP라는 것 자체가 뛰기만 하면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다는 얘기다.

김연경은 “만장일치로 받게 되어 너무 영광스럽다. 돌이켜보면 올 시즌 힘든 순간들이 참 많았는데, 코칭스태프와 동료들이 도와줘서 좋은 상을 받을 수 있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10일 서울 용산구 그랜드 하얏트호텔에서 프로배구 2022-2023 V-리그 시상식에서 여자부 정규리그 MVP를 수상한 흥국생명 김연경이 소감을 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시즌 중 “은퇴를 고민하고 있다”고 했고, 지난 6일 챔프전 5차전을 마친 뒤엔 “팬분들이 많이 와주시고, 가족이나 주변 지인들이 더 뛰길 바라신다”며 현역 연장을 은근히 시사했던 김연경은 이날 선수 생활을 더 이어갈 것임을, 현역 연장 의사를 100%라고 확인시켜줬다. 그는 “선수를 좀 더 하려고 한다. 소속 구단인 흥국생명과도 협상 중이고, 다른 구단들과도 얘기를 나누고 있다”고 말했다.

흥국생명을 떠나게 되는 것을 가정할 때, 가고 싶은 팀의 조건은 역시 우승이었다. 올 시즌 통합우승을 놓치면서 우승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졌다. 김연경은 “우승할 수 있는 팀, 적응이 덜 힘든 팀이 옮기고 싶은 팀이다”라고 답했다.

이번 FA 명단에는 절친인 김수지(IBK기업은행)를 비롯해 김연경과 평소 절친한 선수들이 시장에 많이 나와 있다. 항간에는 김연경이 친한 선수들과 함께 뛰고 싶어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에 대해 김연경은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 몇몇 선수가 있긴 하다. 같이 뛰어보자고. 그러나 같이 뛰자고 뛸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제 결정이 우선이긴 한다. 우승 목표가 먼저다”라고 답했다.

그 과정에서 ‘페이컷’이란 단어도 나온 것이다. 김연경은 “우승 전력이라면 조건을 낮추는 페이컷이 가능하다. 연봉을 낮춰받는 것에 대한 안 좋은 시선이 있다. 제가 연봉을 낮추는 것은 감내하면서도 우승할 수 있는 팀에 가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김연경이 언급한 페이컷에 대한 안 좋은 시선은 양효진이 2022~2023시즌을 앞두고 원소속팀 현대건설과 계약을 맺은 것을 두고 한 얘기일 가능성이 높다. 2021~2022시즌을 마치고 FA 자격을 재취득한 양효진은 현대건설과 연봉 5억(보장금액 3억5000만원+옵션 1억5000만원)에 재계약 했다. 이를 두고 시장 평가대로라면 보수상한선인 7억원을 받을 수 있는 양효진이 다른 팀원들의 FA 계약을 위해, 샐러리캡을 맞추기 위해 고의로 연봉을 낮춘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설령 그것이 고의이건, 아니건 간에 선택은 선수의 몫이다. 7억원을 다 받아버리면 샐러리캡의 유동성이 막혀버려 다른 주전, 백업 선수들과의 계약이 힘들어진다. 선수들이 뛰는 이유는 우승이다. 그 목표를 위해 자신의 몸값을 낮추는 것 역시 선수의 고유 권한이자 선택이다. 이를 비난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그야말로 FA라는 제도 자체가 선수 본인의 자유의지로 계약을 맺을 수 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진=연합뉴스
일각에서는 김연경이 ‘페이컷’을 언급한 것이 현대건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흥국생명에 잔류한다면 김연경이 페이컷을 할 필요는 없다. 항간에 이적설이 흘러나오는 팀 역시 김연경에게 보수상한선 최대인 7억7500만원을 제시할 수 있을 만큼 샐러리캡에 여유가 있는 곳들이다.

반면 현대건설은 양효진 외에도 다수의 고액 연봉자들을 보유하고 있어 샐러리캡 유동성이 적은 팀이다. 이번에 FA로 풀린 황민경과 김연견, 황연주 등을 다 잡고도 김연경을 붙잡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김연경이 국가대표 시절 10년 이상 룸메이트로 지낼 정도로 서로의 속을 모두 터놓고 지내는 후배 양효진과 같이 뛰기 위해서 페이컷도 가능하다는 말을 했다는 분석이다.

현대건설 관계자는 “우리도 김연경 선수와의 계약을 고려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과거 양효진 선수의 페이컷 논란도 있었던 만큼 최대한 김연경 선수에게 시장가치 그대로를 안길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과연 10일 시상식 인터뷰는 김연경 버전의 ‘더 디시젼 쇼’의 전주곡이었을까. 확실한 것은 김연경이 보수상한선 금액을 받지 않고 흥국생명이 아닌 팀으로 이적하더라도 누구도 비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V리그에서 6시즌을 이제야 채운 김연경에겐 자신의 어느 정도의 연봉을 받을지, 어느 팀으로 갈지 혹은 잔류할지 등 모든 이적에 관련된 사항이 그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남정훈 기자 ch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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