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완의 디알로고] “유전자 길목 잡으면 질병 극복 가능...삼성 같은 대기업이 직접 연구소 세워라”
“유전자 조절로 부작용 없는 치료 가능해진다
원천 기술 확보했지만, 세계 이끌 연구자 부족
대학 이어 미국 기업으로도 두뇌 유출 심각
머뭇거리면 반도체 이어 바이오도 인력난 온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632년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란 책에서 당시 주류 이론이던 천동설을 배격하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했습니다. 갈릴레이의 ‘디알로고(Dialogo·대화)’처럼 심층 인터뷰를 통해 세상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김빛내리(54) 서울대 생명과학부 석좌교수는 지난 2월 세계적인 과학 학술지인 ‘네이처’에 리보핵산(RNA) 치료제에서 핵심이 되는 ‘다이서’ 단백질의 작동 원리를 밝혀냈다고 발표했다. 같은 날 이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최초로 규명한 논문도 노성훈 서울대 교수와 함께 발표했다. 과학자가 평생 한 번 발표하기도 힘들다는 네이처 논문을 백투백(back-to-back) 홈런처럼 하루에 두 편이나 낸 것이다.
생명의 설계도는 세포에 있는 유전물질인 디옥시리보핵산(DNA)에 담겨있다. DNA 유전정보는 필요한 부분만 전령리보핵산(mRNA)으로 옮겨져 생명 현상을 좌우할 다양한 단백질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길이가 짧은 이른바 마이크로RNA는 다른 mRNA에 달라붙어 단백질 합성을 차단한다. 마이크로RNA를 모방해 만든 RNA치료제는 같은 방법으로 특정 유전자가 과도하게 작동하면서 생기는 병을 막을 수 있다.
김 교수는 마이크로RNA의 생성, 작동 과정을 잇달아 세계 최초로 규명해 큰 주목을 받았다. ‘여성과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로레알-유네스코 세계여성과학자상을 받았으며, 국내에서는 호암상, 아산의학상, 최고과학기술인상을 휩쓸었다. 늘 한국인 노벨상 수상 1순위로 꼽힌다. 현재 기초과학연구원(IBS) RNA연구단도 이끌고 있다. 김빛내리 교수는 지난 7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인간이 태어나서 살아가는 모든 과정이 유전자 조절에 의해 좌우된다”며 “그 길목을 잡고 연구한 덕분에 이제 질병 유전자만 골라 치료할 수 있는 날이 목전에 왔다”고 말했다.
문제는 세계 선두권으로 도약할 기회를 얻은 국내 생명과학계가 인력 부족에 발목이 잡혔다는 사실이다. 김 교수는 “세계 과학계를 선도하려면 일정 규모의 연구자 풀(pool, 집단)이 필요한데, 최근 미국의 대학은 물론 바이오기업으로도 두뇌 유출이 심각하다”고 말했다. 그는 “수가 얼마 되지도 않는 의사과학자를 양성하는 문제를 두고 소모적인 논란을 벌일 게 아니라 해외 우수 연구인력이 우리나라에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도록 지원할 방안을 먼저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생명현상의 가장 결정적인 단계를 공략”
–질병 극복을 위해 RNA에 집중한 접근법이 효과가 있었나.
“모든 생명 현상은 유전자 조절로 일어난다. 바이러스든 암이든 마찬가지이다. 유전자를 어떻게 조절하는지 충분히 알면 인간이 개입하는 엔지니어링도 가능해진다. 유전자 조절 중 RNA를 만드는 단계가 가장 결정적이다. DNA 유전정보가 RNA를 거쳐 단백질을 만들기 때문이다.”
–생명과학 최고 권위지인 ‘셀(Cell)’에 논문을 발표하고 8년 만에 대형 연구성과를 냈다.
“마이크로RNA는 ‘드로셔’와 ‘다이서’라는 효소 단백질이 잇달아 기다란 RNA를 잘라내면서 만들어진다. 2015년 셀에 드로셔의 기능을 밝힌 논문을 발표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RNA연구단 우재성 서울대 교수와 함께 드로셔의 3차원 구조를 처음으로 규명해서 셀에 발표했다. 이번에는 다이서의 기능과 구조를 밝힌 것이다.”
–이번에는 곧 질병 치료에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다이서는 마이크로RNA가 최종 합성되기 직전 단계이다. 이번에 다이서가 더 잘 결합하는 유전정보도 알아냈다. RNA 치료제의 생산량과 효과를 높일 수 있는 길을 연 것이다. 일부 암 환자에서 다이서에 돌연변이가 생긴 것도 알아내 암 발병 과정을 이해할 새로운 실마리도 제공했다.”
–RNA 치료제가 질병 치료에 쓰이고 있나.
“간질환을 치료하는 마이크로RNA 치료제가 미국에서 5개 허가받았다. 현재 바이러스 치료제도 여럿 임상시험 중이다. 예를 들어 간염바이러스의 유전자를 공략할 마이크로RNA를 설계하면 난치병인 만성간염을 치료할 수도 있다. 바이러스 DNA가 없어지지 않아도 중간 단계인 RNA가 없어지면 병을 완치할 수 있는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 유전자 지도 세계 첫 완성
–코로나바이러스의 RNA 유전정보도 세계 처음으로 완성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사람과 달리 유전정보가 RNA에 담겨있다. RNA 해독은 기초과학연구원 RNA연구단이 세계적 경쟁력을 갖고 있다. 2020년 국내 감염자가 나오자마자 바로 질병관리본부(현 질병관리청)에서 시료를 가져와 해독했다. 연구단의 장혜식 서울대 교수는 바이러스 유전정보를 디지털화해서 통상 6개월 걸리는 해독과정을 단 3주로 줄였다.”
–그렇지만 mRNA 코로나 백신 개발은 국내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mRNA 백신은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직접 인체에 넣어 면역반응을 유발하는 방식이다. 백신은 대형 제약사와 정부의 집중적인 투자가 있어야 해 쉽지 않다. 하지만 앞으로 새로운 바이러스 대유행이 온다는 데 모두 동의하므로 백신 준비를 해야 한다. 신종 바이러스가 퍼지면 바로 대응할 수 있는 게 현재로선 mRNA백신 밖에 없다.”
–마이크로RNA도 팬데믹 대응에 도움을 줄 수 있나.
“마이크로RNA는 어떤 유전자를 억제하려고 할 때 쓸 수 있고, mRNA백신은 유전자를 새로 넣거나 양을 늘리는 방식이다. 상황에 따라 두 가지 방법을 결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연구실에서도 mRNA가 세포에 들어가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연구를 하고 있다.”
–mRNA 백신 원리가 나온 지 20년 만에 실제 백신이 개발됐다. 마이크로RNA 치료제는 언제 일반화될까.
“유전자를 조절하는 RNA 간섭현상이 2000년대 초에 밝혀졌다. 2018년 마이크로RNA 치료제가 첫 승인을 받았으니 역시 20년 정도 지나 성과가 나온 셈이다. RNA치료제는 공략 대상이 화학약품보다 훨씬 넓고 전달법만 발전하면 급성장할 수 있다. 게다가 단백질인 항체 의약품보다 제조도 쉽다. 우리는 계속 기초연구에 집중하고 활용은 외부에 기술이전을 하는 방식을 생각하고 있다.”
◇바이오헬스가 제2 반도체 되려면 인력 문제 해결해야
–정부가 바이오헬스 산업을 제2의 반도체 산업으로 육성하겠다고 의사과학자 육성안을 내놓았다.
“현재 구상만으로 의사과학자가 충분히 늘지 의사들도 회의적으로 보더라. 생명과학자 풀이 급격히 늘 것 같지도 않다. 사실 의사과학자보다 생명과학자가 훨씬 많이 필요하다. 고급 인력이 이 분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유인하는 정책이 정말 더 중요하다.”
–생명과학 분야에 좋은 일자리가 없어 우수 학생들이 의학계열로 몰린다는 분석도 있다.
“최근 두뇌 유출이 새로운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예전에는 박사후연구원으로 미국에 갔다가 대학에 자리를 잡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은 미국 바이오기업으로 많이 간다. 고급 연구인력을 키우고 국내에 붙잡아두려면 정책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있다.”
–국내 시장이 성장하면 해결될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고급 연구인력을 키우려면 시간이 걸린다. 시장 논리에 맡기면 정작 필요할 때 사람이 없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다. 반도체 인력 부족도 예전부터 얘기됐는데 시장이 좋다고 방관했다. 지금 사람이 필요하다고 할 때 당장 몇 년 만에 배출할 수도 없다. 미국 바이오산업이 급성장하면서 사람을 쓸어 담고 있는데 우리는 가만히 있으니 5년, 10년 뒤를 생각하면 두렵다.”
–박사급 연구원도 문제지만 학령인구가 줄면서 연구실을 운영할 대학원생도 부족하다고 한다.
“박사후 연구원과 대학원생에게 좋은 대우를 해서 연구로 이끌어야 한다. 그러려면 연구개발(R&D) 예산도 늘려야 한다. 또 하나의 현실적인 대안은 외국에서 고급 인력을 데려오는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지면서 유학 문의가 늘고 있지만, 대학생은 현재의 외국인정책상 연구 비자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결국 자기 돈으로 관광비자를 받고 와야 한다. 학부생 대상 인턴 프로그램을 만들고, 기업의 외국인 장학금 프로그램도 늘렸으면 한다.”
–외국인 교수도 늘려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글로벌 연구 협력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외국인 교수가 와도 대부분 문서가 한글로만 돼 있고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지원인력도 없어 실험실 설치와 연구비 신청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영어가 가능한 연구 지원 인력 풀을 만들어 국내 정착 초기 6개월에 집중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의사과학자 논란은 바이오헬스 산업 발전에 생명과학과 의학 융합이 필수적이라는 인식 때문이라고 본다.
“맞는 말이다. 의학과 기초학문이 융합되면 연구 질문도 의학적인 수요를 반영할 수 있다. 그런데 융합은 미국 보스턴처럼 일상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매사추세츠 공대(MIT)에서 전철 타려고 기다리면 옆에서 논문을 읽고 있고 연구를 주제로 토론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보스턴처럼 연구자의 숫자가 많고 밀도가 높은 캠퍼스를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
◇유전자 치료 연구에 집중하는 민간 연구소 세우자
–기초과학연구원 RNA연구단을 이끈 지 10년이 됐다. 다음 단계 목표는 무엇인가.
“지금껏 해온 것처럼 새로운 유전자 조절 메커니즘을 찾는 게 목표이다. 기존 마이크로RNA 연구를 심화시켜 세계에서 가장 앞서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게 한가지 목표이고, 또 하나는 기존에 밝혀지지 않은 새로운 RNA 조절 메커니즘을 찾는 것이다.”
–김 교수의 연구성과에서 보듯 최근 한국 과학이 세계 수준으로 도약할 단계에 왔다는 느낌이다.
“우리 분야만 해도 능력 있는 30대 연구자들이 많이 늘었다. 그런데 달리 보면 위기이기도 하다. 1990년대까지는 점진적으로 발전하다가 최근 갑자기 과학의 발전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축적됐던 성과들이 이제 융합반응을 일으킨다는 느낌도 들고, 정말 우리나라가 정신을 바싹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과학계가 갈림길에 있다는 말인가.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앞선 나라를 따라가기만 하면 됐다. 점진적인 변화니까 가능했다. 그런데 이제 변화에 가속이 붙으면서 다른 종류의 기술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건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선두 그룹이 되느냐, 추격 그룹으로 처지느냐의 문제이다.”
–선두로 도약하려면 새로운 무기가 있어야 할 텐데.
“유전자 정보에 기반한 치료, 즉 유전자 치료는 향후 이십년 안에 성과가 쏟아질 분야이다. 특히 RNA는 유전자를 제어하는데 가장 중요한 도구 역할을 하기 때문에 중요한 분야이다. 한국에 이 주제를 중심으로 연구하는 민간 비영리기관이 있었으면 한다.”
–모델로 삼을 만한 기관이 있나.
“미국에는 유전체 연구에 집중한 브로드 연구소나 분자생물학 중심의 화이트헤드 연구소가 생명과학 발전을 이끌었다. 대학의 경우 연구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특정 분야에 치우치지 않는 점이 장점이자 단점이다. 민간이 기부해 만든 연구기관은 발전 가능성이 높은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집중해서 연구하는 것이 가능하다. 삼성 같은 기업들이 그냥 기부금만 내놓는 방식이 아니라 명확하고 구체적인 비전에 기반해 연구소 설립을 지원한다면 세계를 선도하는 성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맡은 일이 많아 직접 나서기 어렵지만 기회가 된다면 적극 돕고 싶은 생각이다.”
◇육아 지원해 연구원이 아이 셋씩 낳는 이스라엘
–김 교수가 22년 전 미래가 불안정한 계약직 연구교수로 처음 서울대에 왔다. 당시 여성 과학자가 학계에 진입하기 어려웠을 텐데 지금은 어떤가.
“그때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생명과학 분야는 절반 정도가 여학생이다. 대학원생도 비슷하다. 하지만 임신, 출산으로 인한 경력 단절은 여전히 문제다. 어제도 제자가 찾아 와서 출산과 연구를 양립하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연구인력 확보를 위해서도 육아 지원이 필요하다.”
–대학이나 연구소마다 어린이집이 생겼다고 들었다.
“서울대에도 어린이집이 있지만 충분치 않다. 이스라엘 와이즈만 연구소를 가니 점심시간에 식당에 아이들이 뛰어다녔다. 연구원들이 연구실 근처 어린이집에 있던 아이를 데려와 점심을 먹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연구 책임자가 서너명씩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것도 그런 지원 덕분이다.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현실이 어려워도 여전히 과학자의 길이 가치가 있다고 보나.
“연구가 창조적인 일이라는 점에서 정말 좋다. 요즘 젊은 세대가 특히 창조적인 일을 좋아한다. 현실이 불안해서 오기 꺼리지만. 연구를 직접 해보면 아이디어를 내고 검증하는 과정이 굉장히 재미있는 일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내가 즐거워서 하는 일이 사회에도 도움이 되니 얼마나 좋은가.”
–후속 세대를 과학의 길로 이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연구나 인력 지원 정책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어릴 때 경험이 결정적이다. 해외 학회에 나가 석학들에게 왜 과학자가 됐냐고 물으면 절반은 초등학생 시절 딸기에서 DNA를 뽑는 것 같은 재미있는 과학실험을 한 것이 계기였다고 했다. 아버지와 새를 관찰한 경험을 말하는 학자도 많았다.”
☞김빛내리 석좌교수
서울대 미생물학과에서 학부, 석사과정을 마치고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박사후 연구원을 거쳐 2001년 서울대 생명과학인력양성사업단에 계약직 연구교수로 왔다. 성과가 없으면 언제라도 짐을 싸야 할 상황이었지만 빚까지 내서 연구장비를 갖췄다. 이듬해 유전자를 조절하는 마이크로RNA의 생성과정을 처음 밝히면서 세계적인 과학자로 도약했다. 마이크로RNA를 만드는 핵심 두 효소의 구조와 작용 과정을 모두 밝혔다. 2004년 서울대 조교수로 임용됐으며 2017년에는 석좌교수가 됐다. 한국인 최초로 세계 최고 권위의 미국 국립과학원과 영국 왕립학회의 외국인 회원으로 선정됐다. 과학계 최고 학술지인 사이언스(Science)와 생명과학 최고 학술지인 셀(Cell)의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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