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첫 외출'…50년 만에 선보인 직지, 연구·전시 이어질까
국내 전시 노력 미실현…실물 공개 후 공동연구·분석 가능성 주목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주조된 글자로 인쇄된 책으로 알려진 것 중 가장 오래된 한국 책. 연대 = 1377년.'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이하 직지) 표지에는 프랑스어로 이렇게 적혀있다. 프랑스인 콜랭 드 플랑시(1853∼1922)가 쓴 설명으로 추정된다.
외교관으로 두 차례 조선에 머무르며 다양한 고서를 수집했던 그는 직지의 가치를 일찌감치 알아본 것으로 보인다.
세계 인쇄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직지가 50년 만에 수장고 밖으로 나오면서 앞으로 직지를 어디에서, 어떻게 볼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1900년·1972년·1973년…세 차례의 전시, 그리고 50년의 기다림
직지의 존재가 널리 알려진 건 1900년 4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였다.
2012년 한국멀티미디어학회지에 실린 '직지의 전존 경위' 보고서 등에 따르면 당시 박람회 현장을 둘러본 사람들은 한국 인쇄술의 역사를 다룬 책들을 전시한 진열대에 주목했다고 한다. 바로 직지가 전시된 공간이었다.
동양학을 공부한 뒤 한국의 서지학을 정리한 모리스 쿠랑(1865∼1935)의 기록에서도 직지를 찾을 수 있다.
쿠랑은 1901년 펴낸 '한국서지' 보유판 머리말에서 "지난 해(1900년) 프랑스에 도착한 도서 중에 한국 인쇄사에 대한 가장 흥미 있는 것"이라고 언급한 뒤 직지를 3천738번째 항목으로 소개했다.
이후 경매에 나온 직지는 골동품 수집가 앙리 베베르(1854∼1943)의 손에 넘어가게 됐고, 그가 사망한 뒤 1952년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기증됐다. 도서관에 등록된 분류명은 '한국책 109번'이었다.
한동안 도서관 수장고 보관돼 있던 직지가 다시 주목받은 건 1972년이다.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근무하던 박병선(1923∼2011) 박사가 자료를 분류하고 해제하던 중 직지를 발견했고, 제1회 '세계 도서의 해'를 기념해 열린 전시에 소개하면서 세간의 이목이 쏠린 것이다.
금속활자로 인쇄된 가장 오래된 서적으로 공식 인정받은 것도 이 전시의 영향이 컸다.
당시 프랑스 국영 제1TV는 직지가 "구텐베르크의 발명(구텐베르크 성서를 뜻함)보다 78년 앞선다"며 "우리는 금속활자의 영광을 이제 동양의 한 나라(한국)에 돌려줘야 할 것"이라 보도하기도 했다.
이듬해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열린 전시회 '동양의 보물' 역시 직지를 귀중한 책 가운데 하나로 소개했다.
'외규장각 의궤'와는 차이가 있는 직지…'압류 면제' 조항도 신중해야
직지가 오랜 기간 수장고에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국립중앙박물관, 충북 청주시 등 여러 기관이 직지의 국내 전시를 추진했으나 번번이 성사되지 못했다.
정확한 이유가 공개된 바는 없지만, 프랑스 측은 압류 가능성을 문제 삼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실제로 지난 2021년 황희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직지의 한국 전시를 요청했을 때 프랑스 측은 압류 우려가 없다면 검토하겠다는 뜻을 전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외국에 있는 우리 문화유산이 전시 등의 목적으로 잠시 들어왔을 때 압류하거나 몰수 조치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압류 면제 조항'이 논의되기도 했지만, 명문화하는 절차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일각에서는 과거 서구 열강의 이권 침탈과 일제 식민 지배를 겪으면서 수많은 문화유산이 국외로 유출된 역사를 고려하면 해당 조항을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직지가 해외로 반출된 경위는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에서 약탈한 '외규장각 의궤'와는 다르다는 평가를 받는다.
학계에서는 구한말 당시 주한프랑스공사가 지방을 돌다 우연히 직지를 구매한 뒤 프랑스로 가져갔고, 후에 직지가 도서관에 기증됐다는 게 정설로 여겨진다.
통상 정당하게 수집하거나 구매한 물품에 대해서는 국제법이나 관행상 돌려달라고 주장하기가 쉽지 않다.
문화재 분야의 한 인사는 "직지는 반출 경위가 명확한 편"이라며 "일부에서는 영구 임대 형식으로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 사례를 거론하기도 하지만, 무조건 환수해야 한다거나 반환을 주장할 대상이 아니다"고 말했다.
"50년 만의 공개만으로 의미 커"…향후 공동 연구·분석 기대 의견도
학계 안팎에서는 이번 전시가 직지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재정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반세기 만에 수장고 밖으로 나온다는 것 자체로 의미가 크다"며 "인쇄 발달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유물을 일반 관객에게 공개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고 평가했다.
김성호 청주고인쇄박물관 직지코리아팀장은 구텐베르크 성서와 직지를 함께 공개하는 점에 의의를 두며 "전시 도입 부분에 직지를 소개함으로써 그 의미와 가치를 알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한국과 프랑스 측이 협력한 부분은 눈여겨볼 만하다.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금속활자본이 간행된 다음 해인 1378년 펴낸 목판본 직지 관련 자료와 백운 경한(1298∼1374) 스님 어록 등을 도서관 측에 제공하고 번역도 지원한 것으로 전해졌다.
직지의 편찬 배경과 한국 불교의 인쇄 문화유산을 주제로 한 콘퍼런스도 현지에서 열린다.
반세기 만에 직지를 대중에 공개한 만큼 앞으로 다양한 협력을 기대할 수 있으리란 전망도 있다.
문화재 분야의 한 관계자는 "오랜 기간 수장고에 있었던 만큼 (프랑스 내에서) 사실 직지와 관련한 연구 성과가 많지 않다"며 "프랑스 측도 이를 알고 전시에 내놓으면서 향후 공동 연구나 분석을 기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지학자인 옥영정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50년 동안 공개하지 않던 직지를 꺼내게 된 데는 여러 노력이 있었을 것"이라며 "직지가 왜 중요한지 정확히 규명하고 학술 연구와 보존 노력을 병행하면서 제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ye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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