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일에 집착하다 뒤통수 맞은 윤석열 정부…“실익 다 빼앗겨”
한-미 동맹과 한·미·일 협력 강화를 앞세운 윤석열 대통령의 외교·안보 정책이 취임 1년도 안 돼 난국을 맞고 있다. 일본 정부는 11일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 계승’을 빼고 독도 영유권 주장을 담은 ‘외교청서’를 내놨고, 미국은 정보기관이 한국 국가안보실을 도·감청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이런 가운데 북한은 닷새째 남북 정기 통화에 불응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이날 공개한 외교청서에서 과거사와 관련해 “일본 정부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을 계승한다”는 내용을 담지 않았다.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 계승’이란 1998년 10월 발표된 한-일 공동선언(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일본 정부가 계승한다는 것으로, 이 선언에는 일본의 과거 식민 지배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죄가 담겨 있다. 외교청서는 대신 “다케시마(일본이 주장하는 독도 이름)는 역사적 사실에 비춰봐도 국제법상으로도 명백한 일본 고유의 영토”라며 독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일본 정부의 태도는 윤 대통령의 예측과는 반대다. 윤 대통령은 한-일 정상회담 뒤 비판이 들끓자 회담 닷새 뒤인 지난달 21일 국무회의에서 “한-일 관계는 한쪽이 더 얻으면 다른 쪽이 그만큼 더 많이 잃는 제로섬 관계가 아니다”라며 “한국이 선제적으로 걸림돌을 제거해 나간다면 분명 일본도 호응해 올 것”이라고 말했다. 외교부는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며, 이를 즉각 철회할 것을 촉구한다”는 성명을 내고, 구마가이 나오키 주한일본대사관 총괄공사를 초치해 항의했다.
그러나 역사 인식 계승이 누락된 것에는 “(일제 강제동원) 해법이 발표된 지 한달 지난 상태고, 지금까지 일본 쪽에서도 성의 있는 조치가 이어지고 있다”며 별다른 항의를 하지 않았다. 앞서 일본 문부과학성은 지난달 28일 일제의 징용과 징병 강제성을 희석하고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내용의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 검정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한-미 관계는 미국 정보기관의 도청 문제가 불거지며 난관에 봉착했다. 대통령실은 이날 “한·미 국방장관이 ‘(도청) 해당 문건의 상당수가 위조됐다’는 사실에 견해가 일치했다”고 발표했다. 한-미 동맹에 영향이 없다는 점을 부각한 것이다.
그러나 ‘한-미 동맹 강화’를 사실상의 제1 외교원칙으로 내세우며 국제관계에서 미국과 적극 보조를 맞춰온 상황에서 드러난 도청 정황은 정부로선 당혹스러운 결과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캄보디아에서 발표한 한·미·일 프놈펜 성명에서 북한 핵·미사일 위협 규탄과 함께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 유지 재확인 △인도·태평양 지역 현상 변경 시도 반대 △남중국해 항행 자유 보장 등에 합의하며 중국 견제에 초점을 맞춘 미국의 대외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앞서 미국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 지원법을 제정하며 자국 우선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두 법은 동맹인 한국 기업에 타격을 주는 법이었다. 윤 대통령은 취임 뒤 1년 가까이 미·일에 다걸기(올인) 하다시피 한 외교 정책을 추진했지만, 뒤통수를 맞은 셈이다.
남북 관계는 악화 일로다. 북한은 이날까지 남북 공동연락사무소와 동·서해 군 통신선의 정기 통화에 불응했다. 지난 7일 이후 닷새째 불통이다.
윤 대통령은 취임 뒤 북한이 비핵화 협상에 진정성 있게 나서면 여러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내용의 ‘담대한 구상’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에 북한이 냉담한 반응으로 일관하고, 한-미 동맹과 한·미·일 협력 강화 기조 속에 군사훈련을 확대하면서 긴장은 고조됐다. 특히 윤 대통령은 지난달 현 정부에서 처음 공개한 북한인권보고서를 언급하며 “북한 주민의 처참한 인권 유린의 실상이 국제사회에 낱낱이 드러나야 한다”, “핵개발을 추진하는 상황에서는 단돈 1원도 줄 수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 일변도의 외교에서 탈피하고, 프랑스가 미국의 대중견제 노선에 거리를 두며 국익 외교를 펴는 상황에서 한국이 한·미·일 협력에 집착하면 외교무대에서 뒤처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준형 전 국립외교원장은 “미국이나 일본과 협력을 하더라도 철저하게 따지고 우리가 챙길 것은 챙겨야 한다”며 “그런데 지금은 기울어진 협력하에서 실익을 모두 빼앗기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최종건 전 외교부 1차관은 “한·미·일 협력의 정의를 우리 스스로 세우지 않은 채 뛰어든 것 같다”며 “그런 상황에서 무조건 한·미·일 협력이라고 하면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이야기하고 있으니 이리저리 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신형철 기자 newir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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