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경대] 내 귀에 도청장치가

1988년 8월 4일 밤 9시. MBC 뉴스데스크 강성구 앵커는 “물가가 급등하고, 아파트와 땅값 등 부동산 투기가 만연하면서 인플레에 대한 불안심리가 확산되고 있다”면서 막 방송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어떤 사람이 다가와 “제 귀속에 도청장치가 들어있습니다”라고 외쳤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강 앵커는 “뉴스 도중에 웬 낯선 사람이 들어와서 행패를…”이라 했고, 도청장치의 주인공은 방송국 직원에 의해 현장에서 끌려 나갔다.

물론 이 사람 귀에는 도청장치는 없었다. 자기 귀에 늘 도청장치가 있다는 피해 망상이 있는 사람에 의해 발생한 해프닝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우리 사회가 감시에 대한 공포심이 여전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특히 1년 전, 6월 민주화운동으로 민주주의가 진전된 상황에서도 도청을 통해 국민의 사생활을 감시하고, 권력이 이를 악용하면 개인의 자유가 얼마든지 침해될 수 있음을 깨닫게 했다.

1978년 미국 대사관과 정보기관에서 청와대 통신을 도청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 계획에 대응해 박정희 정권은 자주국방이라는 명분으로 미사일은 물론 핵무기까지 개발하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도청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에 반발하는 학생, 시민들의 시위가 잇달았다. 그런데 집회 시위 자유가 철저하게 제한됐던 당시 상황에서 미국을 대놓고 비난하는 시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 정권의 용인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도청(盜聽)은 다른 사람의 사적 대화를 몰래 엿듣는다는 의미에서 범죄행위에 해당된다. 우리나라 통신비밀보호법은 ‘공개되지 않는 타인 간의 대화를 청취하거나 녹음하는 행위’를 하는 경우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최근 미국이 우리나라 대통령실을 도청했다는 문건이 미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보도에 따르면 도청된 내용에는 우리나라 외교안보 콘트롤타워였던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과 이문희 전 외교비서관의 대화도 있다고 한다.

만약 사실이라면, 대한민국 국민인 ‘내 귀에도 도청장치’가 들어있는 것 아니겠는가.

천남수 강원사회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