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적 처벌 위해 참수형 부활”...독립협회 해산과 공포의 3년 [박종인의 땅의 歷史]

박종인 선임기자 2023. 4. 12.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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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 근대로 가는 길목⑤
대한제국 광무제 고종은 권력 장악을 위해 근대를 포기하고 정치 파트너였던 독립협회를 강제로 와해시켰다. 개혁세력은 권력 분산을 통해 근대국가 건설을 꿈꿨지만 고종은 1899년 권력을 황제에 집중시킨 ‘대한국 국제’를 통해 반근대적 입법독재를 완성했다. 이듬해 1900년 고종은 갑오개혁 때 폐지했던 참수형을 부활시키고 이를 국사범에게 적용하겠다고 선언했다. 10년 뒤 대한제국은 식민지로 전락했다. 독립협회가 야심차게 건설했던 독립문은 일본 사진엽서에 ‘도쿠리추몬’이라는 볼거리로 전락했다./부산광역시립박물관

유튜브 https://youtu.be/zUO02qb8k34(박종인의 땅의 역사)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근대로 가는 길목> 목차

① 총리대신 김홍집 살인사건

② 홍영식의 야만적인 죽음

③ 김옥균의 끔찍한 처형

④ 1894년 8월 일본내각회의

⑤ 독립협회 강제해산과 공포의 3년

⑥/끝 을사조약과 김구 이상설 이승만

지난 이야기

1884년 갑신정변으로 시작된 조선 엘리트들의 근대화 작업은 고비마다 고종과 저항 세력에 의해 좌절됐다. 정변 주도자들은 잔인한 방식으로 처형되거나 망명했다. 홍영식은 거리에서 죽었다. 연좌 처형을 두려워한 가족은 자살했다. 망명한 사람들 가족도 처형됐다. 1894년 일본에 망명했던 김옥균은 상해에서 암살됐고 시신은 고종 명에 의해 토막 훼손됐다. 1896년 갑오개혁정부 총리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대신 정병하는 고종 명에 의해 경찰에게 난자당해 처형됐다. 경찰이 종로에 방치한 시신은 행인들에 의해 훼손됐다.

대한제국 선포와 독립협회

그리고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이 13년 전 못 이룬 근대화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고종과 손을 잡았다. 독립협회가 탄생했다. 하지만 반(反)근대적 권력에 대한 고종의 집착은 서재필 상상을 초월했다. 시대정신을 완전히 역행해버린 공포정치(恐怖政治)가 시작됐다.

1895년 12월 25일 서재필이 미국에서 귀국했다. 갑오개혁 정부가 강력하게 요청한 탓도 있지만 ‘민중의 무지몰각으로 실패한 정변’(서재필, ‘회고 갑신정변’, 갑신정변회고록, 건국대출판부, p238)에 대한 아쉬움도 귀국 동기였다. 오만이 아니었다. 근대화에 대해 대중을 각성시키는 선행 작업 없이 서둘러 일으킨 정변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반성이었다.

하여 귀국한 그가 만든 조직이 독립협회였고, 협회가 한 작업이 독립신문 창간과 만민공동회 개최였다. 독립은 500년 조공관계였던 대청(對淸) 자주독립을 뜻했다. 협회 창설에 앞서 1896년 4월 7일 창간한 독립신문은 대중에게 근대정신을 깨우기 위한 매체였다. 문자는 순한글이었다. 석 달 뒤인 7월 2일 서울 광화문 외부(外部: 외교부) 건물에서 독립협회가 창립됐다. 11월 독립협회는 굴종의 상징인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이듬해 2월 러시아공사관에 도주해 있던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그해 10월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독립신문’은 이를 ‘조선 사기 몇 만년을 지내더라도 제일 빛나고 영화로운 날’(1897년 10월 14일 ‘독립신문’)이라고 묘사했다. 13년 전 목숨을 걸었던 반역자와 죽음을 요구했던 군주가 손을 잡고 미래를 함께 설계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서울 광화문광장 옆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앞에 서 있는 ‘독립협회 창립총회 터’ 안내판. 1896년 7월 2일 서재필이 이곳에 있던 대한제국 외부(外部: 외교부) 건물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박종인 기자

만민공동회와 친러 황제의 반발

제국은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었다. 그런데 제국을 선포한 황제는 러시아를 택했다. 1898년 1월 러시아는 고종 신변 보호 대가로 부산 절영도 조차를 요구하며 부산에 군함을 입항시켰다. 얼지 않는 항구를 찾는 러시아 전통적인 부동항(不凍港) 정책이다.

이미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있을 때부터 각종 이권을 러시아에 넘겨왔다. 이를 보고 달려드는 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은 물론 일본에도 이권을 하나둘씩 넘겨주는 상황에서 이는 대한제국을 군사를 동원한 러시아 영향력하에 안주시키겠다는 뜻이었다.

이미 수시로 대중 토론회를 주관해온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10일 종로에서 러시아 문제를 안건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20만명 안팎이던 서울 주민 가운데 1만명이 참석했다. 500년 동안 사농공상 네 신분 가운데 최하급으로 살던 ‘쌀장수’ 현덕호가 공동회 회장에 선출됐다.

참석자들은 절박했다. 토론회는 그해 말까지 거의 매일 열렸다. 외국인 눈에 나라는 이미 ‘수려한 자연을 제외하고는 가난밖에 볼 게 없고, 부패한 관리들 착취를 받지 않는 유일한 사람은 재산 없는 사람’인 비참한 상황으로 추락해 있었다.(1898년 1월 15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외교보고서 ‘조선의 정세’, 한국근대사에 대한 자료, 서울대독일학연구소 역, 신원문화사, 1992, pp.352~355) 그 상황 탈출을 위해 만민공동회가 요구한 사항은 세 가지였다. 자주독립과 자유민권 그리고 자강개혁.

당시 친러 성향을 보이던 황제로서는 어느 하나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였다. 왜? 황제 권력과 황실 재정 일정 부분을 황민(皇民)과 공유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반동, 대반동이 시작됐다.

참수형을 부활시키다

1898년 11월 21일 김옥균 암살범 홍종우가 이끄는 황국협회가 경운궁 앞 만민공동회를 공격했다. 황실 수비대인 시위대가 몽둥이를 든 황국협회를 인도했다. 다음 날 고종은 ‘외국에 의뢰하여 국체(國體)를 훼손시킨 자를 처단하는 예’라는 법률을 반포했다. 1조는 ‘외국인에 의탁해 국체를 훼손한 자는 대명률 도적편 모반조에 의거 처단’이라고 규정했다. 대명률에 따르면 모반죄 형벌은 참수형이다. 목을 잘라 죽이는 것이다. 1894년 갑오개혁 일환으로 폐지했던(1894년 음12월 27일 ‘고종실록’) 야만적 참수형을 역적에게 부활시킨 것이다. 그 대상은 망명한 정객, 국적이 외국인 정치가들이었다.

보름이 지난 12월 6일 마지막 만민공동회가 시작됐다. 12월 16일 토론회에서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를 복귀시키자는 논의가 나왔다. 요구한 사람은 이승만과 최정덕이었다.(1898년 12월 27일 ‘윤치호일기’) 12월 22일 시위대 2대대 소속 군인 2명이 만취한 채 고등재판소 앞 토론장에 난입해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이를 신호로 시위대 부대가 토론장을 포위했다.(1898년 12월 26일 ‘황성신문’) 토론회는 위기감 속에 뿔뿔이 흩어졌다. 군부대신 민병석과 탁지부대신 민영기가 자금 2000원을 들여 독립협회 파괴를 선동했다.(1898년 12월 24일 ‘고종실록’) 여기에는 “메이지유신 때도 용맹한 병사들이 민회를 제압했다”며 독립협회 해산을 권유한 특명전권공사 가토 마스오(加藤增雄) 역할도 컸다.(정교, ‘대한계년사’4, 1898년 12월 18일)

12월 25일 고종은 일체의 집회 금지 조령을 내렸다. “우둔한 무리들이 모임을 연다면 경찰이 철저히 규찰해 금지시키라.”(1898년 12월 25일 ‘고종실록’) 거리는 무장경찰이 점령했고, 집회는 금지됐다. 독립협회는 해산됐다. 독립협회 간부들은 체포됐다. 이들은 6년이 지난 1904년에야 석방됐다.

1898년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체포돼 종로 한성감옥에 수감됐던 독립협회 간부들. 앞줄 오른쪽부터 이정식, 이상재, 홍재기, 강원달, 뒤쪽 오른쪽부터 부친 대신 복역했던 소년, 안국선, 김린, 유동근, 이승인. 왼쪽 끝에 따로 서 있는 사람은 이승만이다. 이들은 1904년에 출옥했다. 사진은 디지털 컬러링 작업을 거쳐 컬러로 복원했다./이승만기념관

‘수많은 영효와 재필을 죽이라’

서재필이 희구했던 근대는 거기에서 좌절됐다. 이후 1905년 을사조약으로 나라가 실질적으로 사라질 때까지 대한제국 수도 한성에서 집회는 단 한 번도 없었다.

1899년 1월 4일 황제 자문기관인 중추원 전 의관 노수학이 상소했다. ‘박영효가 한 명 있어도 위험한데 지금은 몇 명의 박영효, 몇 명의 서재필, 몇 명의 안경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협회 괴수들을 보이는 대로 붙잡아 남김없이 죽이시라.’ 고종은 “공분하고 있다”고 답했다.(1898년 음11월 23일 ‘승정원일기’)

1899년 8월 17일 고종 명에 의해 ‘대한국 국제’라는 법률이 만들어졌다. 9조까지 있는 이 법률에는 대한국은 전제군주국이며 오로지 황제가 모든 권력과 권리를 가지며 신민은 복종의 의무만 있다고 규정돼 있었다.(1899년 8월 17일 ‘고종실록’) 법적으로 완벽한 고종 1인 독재 체제의 완성이었다. 그 어떤 집회도 없는 황도(皇都)에서 고종은 자기 등극 40주년을 기리는 각종 연회와 기념물 조성을 위해 국고와 황실비를 끝없이 사용했다.

이듬해 9월 29일 고종은 당시 형법에 해당하는 ‘형률명례’를 개정, 반포했다. 개정안에는 ‘황실범과 국사범 즉 역적은 참수형에 처하고 그 재산은 압수한다’고 규정돼 있었다. 외국과 연계 여부를 막론하고 황제에게 도전하는 그 어떤 이도 목을 베서 처형하겠다는 법률이었다.(1900년 9월 29일 ‘고종실록’) 근대인들이 만들어가던 근대(近代)는 바로 그 지점에서 사라졌다.

고종이 민권주의자라는 주장

전 국사편찬위원장인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렇게 주장한다. “태황제(고종)가 1909년 3월 서북간도민에게 내린 교유서 내용이 남아 있다. 거기서 고종은 ‘대한은 나의 것이 아니다. 너희 백성의 것’이라고 선언한다. ‘민이 쌓여서(積民·적민)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더냐’라고 했다. 이게 서양 근대 정치사상이다. 고종이 사실상 국민주권을 선언한 것이다.”(‘고종 근대화업적 재평가해야’, 2019년 1월 21일 ‘동아일보’)

‘민이 쌓여서 나라가 된다’고 이 교수가 말한 원문은 ‘國迺積民(국내적민)이오 民能善群(민능선군)이니라’이다.(1909년 3월 15일 ‘서북간도 및 부근 각지 백성 등에 내리는 칙유’, 宮中秘書, 이왕직실록편찬소) 이 교수는 ‘고종시대 民國 이념의 전개’(‘진단학보’ 124호, 진단학회, 2015)라는 논문에서는 이를 ‘나라는 곧 民이 쌓인 것(積民)이오 민은 선량한 무리(善群)이다’라고도 해석했다.

두 해석 모두 명백하게 틀렸다. 이 문장을 한문 문법에 맞게 해석하면 ‘나라가 이에 백성을 모아야 백성이 능히 무리를 지을 수 있다’라는 뜻이다. ‘國迺積民’은 ‘나라가 이내 백성을 모은다’는 뜻이다. ‘백성이 쌓여서 나라가 된다’라는 해석은 주어와 목적어가 바뀐 해석이다. ‘能善群’은 ‘선량한 무리다’가 아니라 ‘백성이 능히 무리짓기 좋아한다’는 뜻이다. 나라가 부강해야 백성이 모인다는 ‘국가가 해야 할 일’을 설명하는 고전적인 문구다. 사료를 잘못 읽으면 고종이 ‘개명군주’라는 잘못된 이미지를 주게 된다. 지금까지 봤듯, 고종이 민중에게 보인 행태는 주권재민 따위와 거리가 멀다.

‘대한국 국제’ 선포 넉 달 전, 20세기를 8개월 남긴 시점에 고종은 자기 실체를 스스로 밝혀놓았다. “우리나라 종교는 공부자(孔夫子·공자)의 도가 아닌가. 모든 환란은 종교가 밝지 못해서 비롯됐다. 짐은 유교의 종주로 공자의 도를 밝히겠다.”(1899년 4월 27일 ‘고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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