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09] 공공장소 TV, 서비스일까?

김규나 소설가 2023. 4. 12.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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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또 내일 그리고 또 내일이 기록된 역사의 마지막 글자에 다다를 때까지 죽음은 이렇게 살금살금 걸어서 날마다 조금씩 다가오고 있지. 그리고 우리의 과거는 모두 바보들이 죽음으로 가는 길을 비춰 주었을 뿐. 꺼져 간다, 꺼져 간다, 짧은 촛불이여! 인생은 단지 걸어 다니는 그림자. 무대 위에 나와서 뽐내며 걷고 안달하며 시간을 보내다 사라지는 서툰 배우: 인생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소음과 분노로 가득 찬 백치의 이야기. - 윌리엄 셰익스피어 ‘맥베스’ 중에서

틀니를 맞춰야 하는 어머니를 모시고 일주일에 한 번 치과에 간다. 치료가 끝나길 기다리는 동안 대기실 소파에 앉아 있으려면 정면에 걸려 있는 TV에 저절로 눈이 간다. 하루는 사람이 많아 입구 쪽에 앉았다. 맞은편 넓은 창문과 그 너머로 펼쳐진 하늘과 구름, 저 멀리 울창한 벚나무 숲이 보였다. 그 뒤로는 대기자가 없어도 창을 마주보고 앉는다.

한번은 늦은 밤, 어머니를 모시고 응급실에 간 적 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을까, 걱정이 한가득이어서 대기실에 크게 틀어놓은 텔레비전 소리를 견디기 힘들었다. 언제 호출이 올지 모르니 밖에 나갈 수도, 이어폰을 꽂고 다른 걸 들을 수도 없었다. 다른 보호자라고 달랐을까. 담당자에게 소리를 줄여 달라 부탁했는데 별 이상한 요구를 한다는 듯, 안 된다고 했다.

미용실, 식당, 병원, 공항, 은행 등 어디에나 TV를 틀어놓는다. 보기 싫으면 고개를 돌리거나 눈감을 수 있지만 소음을 피하기는 쉽지 않다. 텔레비전이 귀한 시절엔 공공장소 TV 시청이 서비스였겠지만, 지금은 누구나 스마트폰으로 원하는 것을 보고 듣는다. 조용한 음악과 달리 공간 소유주의 결정으로 틀어놓은 TV는 폭력에 가깝다. 아무도 안 본다면 전력 낭비다.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맥베스는 ‘인생은 그림자, 잠시 무대 위에 선 배우일 뿐’이라는 유명한 대사를 읊조린다. 공공장소에서 리모컨을 쥔 사람은 무엇을 보거나 보지 않을 자유, 무엇을 듣거나 듣지 않을 자유를 빼앗는다. 서툰 배우처럼 살다 가는 그림자 같은 인생인데도 현대인은 그 짧은 무대 위에 펼쳐진 더 작은 무대, 더 서툰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소음과 분노’에 눈과 귀, 생각과 마음을 빼앗기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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