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부터 1년간… 처칠은 혼자서 나치와 싸웠다”

유석재 기자 2023. 4. 12.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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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 펴낸 박지향 교수
서울 서초구 자택에서 만난 박지향 교수는 “처칠이 20세기 초 영국의 복지를 개혁하고 아일랜드 평화에 기여한 업적은 나도 책을 쓰면서 제대로 알게 된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

“사람들은 흔히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싸워 이긴 나라는 미국과 소련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프랑스가 사실상 나치에 굴복한 1940년 5월부터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한 1941년 6월까지, 히틀러와 싸운 사람은 세계에서 오직 처칠 혼자였습니다.”

영국사 전공 학자인 박지향(70) 서울대 명예교수가 윈스턴 처칠(Churchill·1874~1965) 전 영국 총리에 대한 연구서 ‘윈스턴 처칠, 운명과 함께 걷다’(아카넷)를 냈다. 국내 학자가 쓴 처칠 연구서는 유례가 드물다. 이 책을 쓴 이유에 대해 그는 “모두가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훨씬 더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영국이 완전히 패배할 것처럼 보였을 때 결연히 히틀러에 맞섬으로써 서구 문명을 구해낸 인물이 바로 처칠”이라고 말했다. 그 덕분에 인류의 자유와 존엄성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튀르키예에서의 군사적 실패 등 적잖은 과오를 남겼던 처칠은 어떻게 성공한 정치인이 될 수 있었는가? 박 교수는 크게 역사적 통찰력, 도덕적 결단, 설득의 리더십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들었다.

먼저 역사적 통찰력이란 ‘더 멀리 과거를 돌아볼수록 더 멀리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는 처칠의 말처럼 깊은 역사적 지식을 통해 국제질서와 시대를 꿰뚫어볼 수 있는 힘이었다. 처칠은 1920년대 초 독일에서 히틀러가 신흥 정치인으로 떠오를 때 ‘독일 민족주의를 발흥시킬 위험한 인물’이라며 그의 정체를 가장 먼저 간파했다. ‘철의 장막’이라는 유명한 말로 냉전을 예견하고, 한국의 6·25전쟁에 참전해 공산 진영의 기세를 꺾었던 것도 그런 통찰력에서 나온 것이었다.

도덕적 결단 또한 중요한 요소였다. 전쟁 초기인 1940년 많은 영국 국민이 ‘히틀러와 협상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여겼을 때 처칠은 “협상해서는 안 될 세력과는 결코 손을 잡을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총리가 됐다. 처칠은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았고, 위선적인 지식인들을 싫어했다. 친소 성향으로 기울어진 버나드 쇼에 대해선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지식인 광대’라고 질타했다.

처칠의 정책은 독단이 아니라 국민에 대한 끈질긴 설득으로 이뤄졌다. 영국 홀로 나치에 맞서게 됐을 때 그는 “우리는 대의(大義)를 지키는 유일한 챔피언이 됐다”며 국민을 독려했다. 1920년대 아일랜드의 테러리스트들에게 “이제 죽이는 짓은 그만두고 대화를 하자”고 설득해 아일랜드 평화의 초석을 놓고, 영국 복지 개혁의 기초를 닦은 것은 박 교수도 책을 쓰면서 제대로 알게 됐다고 한다. 그는 “설득의 리더십은 솔직함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지금 우리 현실에선 그것이 쉽게 받아들여질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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