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최원준의 음식문화 잡학사전] <12> 영축산 봄나물 밥상
- 초벌부추·머위·냉이·취나물…
- 셀 수 없을 정도로 종류 다양
- 단맛부터 쓰고 시고 매운맛까지
- 저마다 독특한 향·색·식감 지녀
- 생명의 기운 품은 귀한 식재료
요즘 신록이 눈부시게 푸르다. 봄이 절정이란 말이다. 봄은 먼바다에서 시작해서 들과 산의 양지 녘으로 들불처럼 번지다가 이윽고 빈 나뭇가지 끝에서 생명의 기운을 망울망울 터뜨린다.
이때 봄의 첫 번째 증거로 각인되는 것이 봄의 발길 따라 돋아나는 갖가지 봄나물이다. 봄나물은 들이나 산 밭에서 새롭게 움을 트는 식물의 새순을 총칭하는 것으로, 그 종류나 가지 수가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다.
한해살이에서부터 두해살이 여러해살이 등의 초본식물(草本植物, 풀)의 어린잎이 있고, 목본식물(木本植物, 나무)에는 작은 키의 관목과 큰 나무인 교목의 나뭇잎 새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나물이 나는 시기도 각기 다른데 빠르면 3월부터 늦게는 4월 말에 이른다. 나름으로 눈을 뜨는 순서와 자라는 장소 또한 다르다. 그러나 요즘은 하우스에서 계절 구분 없이 재배하거나 산이나 들녘의 농원에서 직접 고소득의 봄나물을 키워내기에 이런 구분이 무색해졌다.
▮독특한 향·색은 생존본능
봄나물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 몸을 세상에 내밀 때 약간의 독성을 띠거나 경고의 향과 색을 드러낸다. 겨우내 굶주렸던 초식동물에게서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보호하느냐에 따라 색과 향 맛이 각기 달라진다. 이들의 보호본능이 맛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 미약한 독성과 향이 우리 인간들에게는 움츠렸던 몸을 각성케 하고 노곤한 춘곤증을 이겨내게도 한다. 사람에게는 약효성분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한양 인근의 산세 좋은 고을의 봄나물을 임금에게 진상했으며, 궁에서도 다섯 가지 봄나물로 밥을 먹었다고 전해진다. 서민들도 다섯 가지 매운맛을 내는 오신채(五辛菜)로 몸의 건강을 지켜냈다고도 한다.
봄나물 중 부추나 머위 취나물 등은 초벌 때 밑동에 경고의 빨간색을 띠고 있는데 필자는 이를 ‘빨간 발’이라 부른다. 이 빨간 발이 있는 놈들이 초벌이고, 그 맛과 약성도 제일 강하다. 시각적으로도 보기 좋아 비싸게 사고 팔리기도 하거니와 약성 또한 좋아 귀한 사람에게만 몰래 먹인다는 귀한 식재료 취급을 받고 있기도 하다.
▮입맛 돌게 하는 ‘봄 한상’
개인적으로 봄을 맞고 또 봄을 누리는 통과의례로 매년 지인들과 봄나물 모임을 한다. 한때 진주시 금산의 지인 인척의 봄나물 농장에서 갖은 산나물과 직접 담근 막걸리로 모임을 했고, 근년에는 시약산 자락 필자의 밭에서 남새와 푸새로 장만한 술상에 돼지 수육 한 접시 앞에 두고 모임을 한다. 가끔 양산의 통도사 인근 사하촌에서 봄나물로 봄 밥상을 즐기기도 하고, 가덕도 바다가 보이는 모처에서 봄나물과 더불어 생선회로 하루를 느긋하게 즐기며 봄을 맞기도 한다. 그래야 몸에 온통 봄의 푸른 물이 들고 사람 몸에도 봄이 찾아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최근 양산 영축산 인근 집에서 봄나물 밥상을 받았다. 직접 담근 집안의 간장과 된장으로 조물조물 무쳐내 이 나물 저 나물 한 접시에 담아냈는데 정갈하고 깊은 맛이 있었다. 아들 사위에게도 안 준다는 ‘아시정구지(초벌 부추)’부터 빨간 발 달고 올라온 쌉싸래함이 매력 있는 ‘머위’, 입맛 되돌리는 강한 향의 ‘산초 여린 잎’에 봄 들판에서 살을 찌운 ‘냉이’, 쓴맛이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고들빼기’와 아삭거리는 식감이 참 좋은 ‘원추리’, 산속 대표 봄나물인 ‘취나물’까지 몽땅 다 담았다. 그 옆으로 바싹하게 튀겨낸 고소한 ‘두릅튀김’과 아삭함이 남다른 궁채를 참깨 소스에 무쳐낸 ‘궁채참깨무침’, 짭조름한 장아찌로 담겨나온 ‘가죽나무 순’, ‘뽕나무 순’ 장아찌에 향이 좋아 밥에 한 잎 큼지막이 쌈을 싸서 먹으면 입맛 돌아오는 ‘곰취잎 장아찌’에 이르기까지 봄나물이란 봄나물은 총출동했다.
▮보릿고개 달래준 식재료
봄이 한 상 가득 차려졌다. 보는 사람 눈마저 푸른 물이 다 들 지경이다. 그릇마다 봄 냄새가 가득한데, 그 맛과 향이 각기 다르고 식감 또한 제각각이다. 어떤 놈은 순한 단맛, 어떤 놈은 쓰디 쓴맛, 새초롬한 신맛에 알싸한 매운맛을 내는 놈까지, 한놈 한놈이 기기묘묘하고 형형색색이다. 게다가 아삭아삭, 쫀득쫀득, 소곡소곡, 잘강잘강 갖가지의 예사롭지 않은 식감으로도 사람 마음을 먹는 내내 흔쾌하게 한다. 나물이 풍기는 그 향은 또 어떠한가? 말 그대로 풀 내가 물씬 풍기는 놈부터 박하 향이 은근한 놈, 생선비린내가 나는 놈, 체취가 덜한 순한 놈에 이르기까지 자연에서 가져올 수 있는 모든 땅의 냄새를 저마다 기억하고 발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봄나물이 한때는 끼니를 대신하거나 끼니를 늘려 먹던 힘겨운 시절의 주요 식재료이기도 했다. 산들에서 아무 데나 나는 나물을 뜯어다가 보리쌀 등의 곡식과 된장, 고추장으로 물을 풀어 나물 등속을 푸짐하게 넣고 끓여 먹던 음식이 ‘나물죽’이었다.
특히 보릿고개에 곡식 한 톨 남아 있지 않았을 때는 나물도 바닥이 난다. 이럴 때면 보리알이 익기 전인 풋보리를 베어다가 작두로 잘게 썰어 이를 볶고 말린 후, 감자와 섞어 먹거나 범벅으로 끓여 먹었다고 한다. 경북 지역의 ‘작두보리범벅’이다. 김치와 밀가루, 봄나물을 넣고 뻑뻑하게 끓여낸 ‘갱시기’나 허튼 생선 한 마리에 밥과 나물 넣고 푹 끓여낸 해안지방의 ‘생선꾹죽’도 이런 봄나물의 아픈 기억을 가진 음식 중 하나이기도 하다.
여하튼, 봄나물은 자신이 왔음을 알리는 ‘봄의 신호’이자 모든 생명이 건강하게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게다가 인체에 유효한 영양소가 각각의 나물마다 풍부하다고 하니 건강 챙기기에도 좋겠다. 모쪼록 이 자지러지는 봄날, 봄나물 밥상 한번 풍성하게 받아보는 호사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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