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대 노인들이 품은 격랑의 근현대사, 잔잔하게 담아내다

조봉권 기자 2023. 4. 12.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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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도시인 부산에 사는 사람은 더 잘 알 터인데, 잔잔한 바다는 늘 잔잔했던 게 아니다.

바다는 전투 흔적을 신속히 지웠을 뿐, 전투 자체를 지울 순 없고 그 전투를 치러내고 지금도 살아가는 사람들의 숨결은 수면을 뚫고 올라오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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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선 소설 ‘아무것도 아닌 빛’

- 부산 ‘은곡동’ 배경 노인 이야기
- 언뜻 고요하면서도 평안한 삶들
- 빨치산 등 굴곡진 흔적은 남아
- 그들의 모습 속 삶의 뜻 건져내

바닷가 도시인 부산에 사는 사람은 더 잘 알 터인데, 잔잔한 바다는 늘 잔잔했던 게 아니다. 긴 세월 폭풍과 태풍, 비바람과 사건사고를 다 겪고 지금의 잔잔함에 이른 바다이다. 작가 김훈은 장편소설 ‘칼의 노래’에서 “바다는 전투의 흔적을 신속히 지웠다”고 썼는데, 이와 비슷하다.


중진 소설가 정영선(사진)이 장편소설 ‘아무것도 아닌 빛’(도서출판 강)을 냈다. 조금 당혹스러웠을 만큼 잔잔히 흐르는 이 소설을 찬찬히 따라가다 보니 이 작품이 ‘잔잔한 바다’임을 느꼈다. 잔잔해 보이지만, 격랑을 품었다. 바다는 전투 흔적을 신속히 지웠을 뿐, 전투 자체를 지울 순 없고 그 전투를 치러내고 지금도 살아가는 사람들의 숨결은 수면을 뚫고 올라오게 마련이다. 작가는 이 모두를 정성스럽게 담았다. 투명에 가까운 문장으로 잔잔하게.

“나는 여든여덟이다.…평생 반외세 통일운동을 한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거고, 가장 힘들었던 일과 기뻤던 일도 쓰라고 하지만 나이가 드니 그게 그거 같아 구별하기 어렵다.” 첫머리에서 주요 인물 안재석이 쓴 자기소개서 일부다. 그는 해방 직후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다가 신불산 빨치산이 되고, 붙들려 긴 세월 복역한 뒤 나와 지금은 ‘은곡동’에 산다. 그는 빨치산 시절 동지에게 배신당해 용두산공원에서 붙들렸다고 지금도 믿는다.

조향자 또한 이 소설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영도의 조선소에서 일하던 조선인 엄마가 일본인 남편을 만나 낳은 딸인데 어릴 때 일본으로 갔다가 부모를 잃고 해방 직후 야마구치의 조선학교에 잠깐 의지한 게 인연이 돼 수정동에 살고 자갈치시장에서 일하면서 길고 긴 운명의 폭풍 속으로 들어간다. 지금은 ‘은곡동’에 산다.

이야기는 격랑의 역사를 품고 잔잔히 흐른다. 예컨대 “식민지 시대 일본에 가서 조센징이라고 차별받고 귀국한 뒤부터 지금까지는 빨갱이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추위와 굶주림에 익숙해진 삶”이었다.(201쪽) 안재석과 젊은 날 함께했다가 일본에 자리 잡은 김대영은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말한다. “이념은 권력을 위한 수단일 뿐이구나…안 선생은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어요?”(215쪽) 안재석은 듣고만 있다.

안재석은 여전히 시민단체에서 통일운동도 하고 독서모임도 나가며 젊은 날 가졌던 신념을 쉽게 다루지 않는다. 희미해졌다 한들, 느낀다. 그러나 나이 90이 돼 복지 혜택을 받으며 사는 그는 이런 생각을 한다. “독서모임이라고 했다.… 책을 읽으면 돈을 주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건 놀랍다.”(10쪽) “지하철역으로 가는 버스는 삼 분 뒤에 닿을 것이다. 버스를 기다릴 때마다 감동이 왔다. 누구나 기다려야 할 시간을 알 수 있는 세상이야말로 평등한 세상이 아닐까. 내가 목숨을 바쳐 이루고 싶었던 세상을 누군가 저 알림판 하나로 이룬 것 같기도 하다.…다른 삶, 다른 세상이 온 것 같다. 피도 흘리지 않고 고함도 치지 않고도 세상은 보기 좋게 변했다.”(19쪽) 조향자의 굴곡진 삶, 안재석의 옛 동지를 둘러싼 복수의 정념, 현대를 사는 평범한 주변 사람들 이야기도 잔잔히 펼쳐진다.

이 소설은 허무를 말하는 게 아니다. 사람의 삶을 깊이 들여다본다. 잔잔함 속에서 격랑을 보고, 삶의 풍경에서 삶의 뜻을 건져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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