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의동 칼럼] 바이든의 미소에 속고 있다
“무너진 한·미 동맹을 재건하겠다”는 윤석열 정부 출범 후 한국의 ‘동맹 중독’은 한층 심각해졌다. 미국 CIA가 대통령실을 도청한 사실이 드러났지만 미국을 향한 항심(恒心)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 이달 말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서울 도심에 걸린 현수막엔 ‘한·미 동맹 완성’ 글귀가 선명하다. 보수층의 맹목 지지라는 고정값에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좌초, 대중 여론 악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노회함이 가세한 결과다.
방위비 분담금을 한꺼번에 5배 올리며 한국을 겁박한 트럼프 대통령 때 한국에선 반미감정이 똬리를 틀었다. 대학생들은 미국대사관저 담장을 넘었다. 트럼프의 좌충우돌에 진저리가 난 한국인들은 바이든에 안도했고, 그의 미소에 저항력을 잃었다.
미소는 공짜가 아니었다. 바이든은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립서비스’로 한국 기업들에서 막대한 대미 투자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한국 기업들은 발등이 찍혀 있다. 현대차는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의 최대 피해자가 됐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보조금을 받으려면 수십조원을 들인 중국 공장의 첨단화를 포기하라는 미국 반도체법 앞에서 머리를 감싸매고 있다. 필수 원자재의 중국 의존도가 높은 기업들도 전전긍긍하고 있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봉쇄’ 여파로 한국의 대중 수출은 10개월 연속 내리막길을 걸었다. 미국은 지난해 한국에 투자하려던 대만 반도체 기업을 설득, 7조원 규모 투자를 가로챈 적도 있다. 자국 경제를 위해 이웃 국가를 가난하게 만드는 것을 ‘근린궁핍화’라고 한다면 바이든의 보호무역·산업 정책은 ‘동맹궁핍화(Beggar thy alliance)’ 전략이다.
바이든은 2021년 첫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판문점선언’을 포함시켜 한국의 평화세력을 안도케 했다. 하지만 북한에 대한 ‘전략적 무시’로 한반도 평화를 대중 전략의 하위 의제로 격하시켰다. 그의 관심은 한·미·일 3각 안보협력에 쏠렸고, 전제조건인 한·일관계 복원을 줄곧 요구해왔다. ‘굴욕’ 비판을 받는 윤석열 정부의 강제동원 해법 배후가 미국임은 바이든이 기다렸다는 듯 성명을 내고 환호한 데서 알 수 있다. 미국이 박정희의 방미 전제조건으로 협상 타결을 압박하던 1965년 한일기본조약 때와 판박이다.
한·미·일 군사협력체제는 오바마 행정부가 시동 건 ‘아시아 재균형’, 즉 중국 포위전략의 주요 수단이다. 미국은 2015년 미·일 방위협력지침을 개정한 뒤 한국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종용했다. 위안부 합의 몇달 뒤 사드가 배치됐고, 이어 일본과의 군사정보보호협정이 체결됐다. 한·일관계 개선과 한·미·일 군사협력이 ‘세트’로 움직이니 머잖아 군수지원협정이 뒤따를 것이다. 협정이 체결되면 예컨대, 부산항에 들어온 일본 군함에 탄약을 실어주는 일이 현실화된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맞서 대규모 연합군사훈련이 빈번히 실시되며 한반도 긴장이 한껏 높아졌다. 한반도가 최첨단 무기들의 테스트베드이자 반중 국가들의 다국적 훈련장으로 개방되고 있는 현실이 참담하다. 지난달 하순부터 2주간 실시된 한·미 연합훈련에는 영국 해병대가 상륙훈련에 처음 참가했다. 대만 유사시 주한·주일미군 출동에 따른 공백을 자위대와 협력관계인 영국군이 메우기 위한 연습의 성격이니 한반도가 대만과 인계철선(tripwire)으로 엮이는 셈이다.
개방형 통상국가 한국은 탈냉전 이후 안미경중(安美經中) 노선으로 평화와 번영을 이뤘다. 하지만 안보와 경제를 일치시키려는 미국의 신전략이 등장했고, 정부가 맹목 추종하면서 외교안보와 경제 양쪽에서 자율성을 잃어가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과 중·러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벌이고, 미·일의 구애 대상인 인도가 러시아 원유를 대량 구매하는 진영파괴·실리 행보와 극명히 대비된다. 아무리 한반도가 ‘지정학적 저주’라고는 해도 외교적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는 있다. 국익 관점에서 동맹을 객관화하는 작업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요즘 한국은 경제가 정점이던 1980년대 후반 일본을 떠올리게 한다. 세계 시장을 석권하던 일본 반도체 산업은 미·일 반도체 협정 이후 쇠락했고, 미국 수출경쟁력을 위해 엔화 가치를 올린 플라자 합의 이후 경제에 거품이 끼었다 터지며 장기불황을 겪었다.
두 계란(안보와 경제)을 한 바구니(미국)에 담아야 하는 한국의 장래에 불안감을 감출 수 없다. 윤 대통령의 미국 방문이 어떤 결과를 몰고 올지 기대보다 걱정이 앞선다. 바이든의 미소와 환대를 국익과 바꿀 순 없다.
서의동 논설위원실장 phil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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