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화이부동] ‘중도’가 실패하는 7가지 이유

기자 2023. 4. 12.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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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개혁 과제가 산적한 나라에서 ‘중도화’ 운운은 결국 수구의 길이다.”(남재희, 2015) ②“중도주의란 가치노선을 모호하게 만들고, 수구적 보수의 가치노선에 대해 선명한 경쟁구도를 형성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경향을 말한다.”(고원, 2015) ③“중도는 사회조사나 여론조사에만 존재하는 어떤 사회적인 환상이지 실제는 아니다.”(이해영, 2017) ④“중도라는 개념은 보수언론이 만든 프레임의 산물이다.”(이재명, 2017) ⑤“ ‘막말’이 정치생명 연장에 도움이 되니까 ‘막말’을 한다. 저쪽 욕을 먹어도 대세에 지장 없다. 지지자들이 환호한다. 온건·중도파가 되는 것은 정치적 자살 행위다.”(김환영, 2017) ⑥“정치에서, 특히 대통령제 아래서 ‘중도’는 신기루일 뿐이다.”(박찬수, 2017) ⑦“보수와 진보 진영을 극단으로 몰아붙이는 중도 노선은 정치평론가가 할 일이지 현실 정치인의 영역은 아니다.”(정연욱, 2023)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중도’에 관한 명언 중 중도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비관적인 것들을 7개 골라 소개했다. 진보 쪽의 중도 비판이 더 많긴 하지만, 보수라고 해서 중도를 환영하는 건 아니다. 중도를 어떻게 평가하건 중도의 정치세력화는 그간 일시적인 바람은 불었을망정 상시적인 제도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점에선 실패한 프로젝트였다.

중도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비관적인 목소리 못지않게 중도의 필요성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많은데, 왜 실패한 걸까? 위에 소개한 명언들이 상당 부분 그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긴 하지만, 나는 좀 다른 관점에서 중도가 실패하는 7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싶다. 다른 관점이라 함은 그간의 분석이 소홀히 했던, 속된 말로 ‘밥그릇’으로 불리기도 하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미시적인 면에 치중해보겠다는 뜻이다.

왜 그런 관점이 필요한가? 우리 언론은 선거 결과에 대해 늘 교훈 중심의 해석에 경도되는 모범생 노릇을 하려고 드는 이상한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이 정치권에 준엄한 경고를 했다거나 무슨 깊은 뜻을 보였다는 등의 창작을 해대면서 “그래, 우린 희망으로 살아가는 거야”라는 식의 ‘정신승리’를 유도한다. 선거란 최고급 일자리와 권력을 얻기 위한 개인들 간의 전쟁이기도 하다는 점은 너무도 발칙하고 불경한 생각이라고 여기는 건지 잘 거론하지 않는다. 이게 더 중요한 것이며, 특히 중도의 실패와 관련해선 결정적인 것임에도 말이다.

2진급, 기회주의자, 바람 편승…

첫째, 현금이 아니라 어음이다. 참여에 대한 보상이 그렇다는 것이다. 거대 양당은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나 선거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게 많거니와 크다. 그런 보상은 가시적이고 즉각적인 현금과 같다. 반면 사실상 무(無)에서 출발하는 중도 세력은 승리 가능성에서부터 확률이 낮은 불확실성과 싸워야 하며, 따라서 참여자들에 대한 보상도 부도날 우려가 큰 어음이다. 지식인들조차 두 거대 진영 중 하나를 선택해야 발언권과 영향력이 생기고 그걸 밑천 삼아 각종 공적 자리를 챙길 수 있는 상황에서 중도를 택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이런 근본적인 차이를 외면한 채 중도가 마치 기존 좌우 두 진영과 대등한 경쟁자라도 되는 것처럼 동일 선상에 놓고 중도의 약점과 한계에 대해 비판하는 건 매우 불공정하다.

둘째, 2진급의 냄새를 풍긴다. 중도는 1진에서 탈락한 사람들이 모인 곳 같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예의 바른 언론은 선거에서 중도 후보들에 대해 그런 점을 잘 지적하지 않지만, 유권자들의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바로 그것임을 어찌 부인할 수 있으랴. 중도는 새로운 노선과 방법론을 역설하고 실천해야 함에도 기존 거대 양당의 정치인 충원 방식을 답습함으로써 사실상 스스로 2진급의 냄새를 풍기기 위해 애를 써왔다.

정치경험은 소중하긴 하지만 그것에만 매달려 충원을 하다보면 2진급이라는 평가에서 벗어날 수 없고 새로운 정치를 해보겠다는 취지도 퇴색되고 만다. “정치란 무엇이며 정치인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던지면서, 무게와 신선함을 동시에 원하는 유권자들의 이중성과 맞짱을 떠볼 배포가 없었다고 볼 수 있겠다.

셋째, 양비론 비판을 위해 비전을 희생한다. 거대 양당 비판은 잘하는데, 독자적인 비전이 없거나 약하다. 이는 언론에 끌려다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언론은 비전이 없다는 지적은 잘하지만 비전 보도엔 인색하며 거대 양당에 대한 날선 비판의 뉴스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모든 게 열악한 처지에서 언론 홍보 의존도가 높아지면 비전을 만들고 키우기 위한 일에 들어가야 할 시간과 에너지와 열정마저 거대 양당 비판에 투자해버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비전이란 게 별것 아니다. 무엇보다도 중도에 대한 심각한 오해부터 바로잡아 유권자들이 중도에 대해 갖고 있을 각종 의구심을 해소해주는 게 바로 비전이다.

넷째, 기회주의로 오해받기 쉽다. 의외로 많은 유권자들이 중도를 “기회를 보다가 결국 유리한 쪽으로 택하겠다는 태도”이자 “날로 먹고 거저먹고 손 안 대고 코 풀겠다는 기회주의 태도”(박남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중도는 미국에서도 의심받는 개념인데, “오랜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중도=사쿠라’라는 등식에 익숙한 한국 유권자들은 미국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다”(박찬수)라고 보는 시각에 설득력이 있다는 걸 인정할 필요가 있다. 중도의 정치세력화를 꿈꾸는 사람들은 이런 의심들을 해소할 수 있는 이론적 반론과 관련 콘텐츠 개발에 주력하는 게 필요하다.

중도운동, 정치·생활운동이어야

다섯째, 기계적 중립으로 오해받기 쉽다. 이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선 모든 이슈에 대한 공부를 거대 양당보다 더 많이 철저하게 해야 함에도 그간 중도는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와 관련, 한국일보 주필 이충재가 지난해 11월 퇴임 인터뷰에서 한국일보가 ‘균형적이고 중도적인 신문’이라는 걸 인정받기 위해선 “기계적 중립이 아닌, 진짜 ‘내공’이 필요하다”며 “정해진 프레임이 없기 때문에 보다 많은 토론과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한 건 의미심장하다. 중도가 더 힘든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거대 양당은 자신들이 내세운 노선을 극단으로 끌고 가는 관성의 지배를 받기 쉽기 때문에 꼭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

여섯째, 뜨거운 열정이 없다. 중도파는 이렇다 할 명분도 없는 편가르기와 이에 따라붙는 뜨거운 열정 자체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편을 끌어 모으거나 단결을 하는 데에 꼭 필요한 열정이 없거나 약하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중도를 가리켜 “열정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식의 담론이 많이 나오고 있지만, 열정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반대편에 대해 갖는 증오와 혐오의 열정은 열정이라기보다는 맹목적인 광신이다. 그런 광신이 전 사회를 지배하는 것에 대해 의분을 느껴 그걸 바로잡고자 한다면, 그게 바로 열정이 아니고 무엇이랴. 올바른 일을 하려는 사람들의 열정이 광신이나 탐욕에 눈이 먼 사람들의 열정보다 약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일곱째, 인프라 투자 없이 바람만 타려고 한다. 사실 이게 중도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자 중도의 성장을 방해해온 최대의 이유였다. 중도는 이른바 ‘선거주의(electoralism)’, 즉 “정치를 선거로 좁히거나 가두는 한편, 선거에서 이기면 나머지는 저절로 풀린다는 지적 오류”(이철희)의 포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중도의 정치세력화는 주요 선거가 임박한 시점에서 시도되었다가 선거 결과에 따라 수명을 더 유지하거나 곧장 죽는 패턴을 반복해왔다. 선거 하나로 만사가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거나, 선거 결과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면서 정치를 선거에 종속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런 모험주의를 자제하고 중도 인프라 구축을 위해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중도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집단사고와 진영논리를 따라하지 않으면 피곤하고 차별받는 사회”(김진석) 자체를 문제 삼으면서, “감정과 태도에서 지나침과 모자람의 양극에 빠지지 않는 중도적 덕성”(채진원)을 키워 나가야 한다. 이는 오랜 시간에 걸친 노력과 성찰을 요구하는 바, 중도를 생활양식으로 체화시킬 때에 비로소 정치운동으로서의 중도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실패의 수렁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 중도운동은 정치운동인 동시에 생활운동이어야 한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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