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경의행복줍기] 명품백은 서글프다

2023. 4. 12.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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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도시생활을 접고 시골로 내려갔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서울 언니가 위로와 격려 차원에서 큰맘 먹고 명품백을 하나 사서 보냈다.

친구는 잘 차려 입고 명품백을 들고 갔다.

부녀회 안건을 토의하며 꽤 긴 시간이 지났지만 아무도 명품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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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도시생활을 접고 시골로 내려갔다. 남편이 간절히 원해서 시작한 시골생활이었지만 참 만만치 않았단다. 특히 동트면 바로 일어나야 모든 게 원활히 돌아가는 곳이라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던 친구는 생활습관을 바꿔야 했다. 물 만난 고기처럼 생기가 도는 남편과 달리 동네사람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해 점점 무기력해졌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서울 언니가 위로와 격려 차원에서 큰맘 먹고 명품백을 하나 사서 보냈다. 시든 난초 잎에 알맞은 양분과 물이 공급된 듯 친구는 바로 기운이 났다.

마침 마을회관에서 부녀회 월례모임이 있었다. 친구는 잘 차려 입고 명품백을 들고 갔다. 부녀회 안건을 토의하며 꽤 긴 시간이 지났지만 아무도 명품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친구는 부러움과 시샘이 무반응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회의를 마치고 부녀회장이 부녀회원들한테 주방 세제통을 하나씩 돌렸다. 세제통을 넣어 들고 갈 만한 마땅한 비닐봉지가 눈에 띄지 않자 이웃집 영우엄마가 친구 명품백 안에 세제통을 집어 넣으며 “마침 큰 가방을 갖고 왔네” 하는 게 아닌가? 비로소 친구는 무반응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명품백은 제법 큰데 가볍고 비싼 가죽도 아니라 막 쓰기 좋은 가방일 뿐이었다. 친구는 명품백 하나로 시선을 끌어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뽐내려던 마음을 슬그머니 거뒀다. 좀 부끄러웠다.

그 뒤 명품백의 수난은 계속되었다. 영우엄마 며느리가 첫돌 지난 아기를 데리고 놀러 왔을 때 기저귀가방으로 차출되었고 남편이 마을회관에서 동네 남자들과 저녁 식사할 때는 집에서 담근 매실주를 넣어야 했다. 미처 말릴 새도 없었다. 이러다가 밭에서 뽑은 무와 상추도 명품백으로 나를 판이었다. 그렇다고 장롱서랍 안에 꽁꽁 숨길 수도 없었다. 명품백의 매력은 무엇인가? 남들이 알아주고 부러워해주는 게 아닌가? 결국 친구는 명품백을 서울 언니한테 다시 보냈다.

‘모든 건 있을 자리에 있어야 빛이 난다.’ 그 와중에 나름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어디 물건뿐인가? 사람의 자리는 더욱 그렇다. 주민센터의 김 선생은 매우 친절하다. 특히 노인들을 정성껏 대한다. 싫은 내색 없이 몇 번이라도 반복 설명하고 직접 서류 작성도 해주고, 외로운 노인이 개인사를 늘어놓더라도 잘 들어 준다. 김 선생이 그 자리에 앉아 있어서 많은 사람이 행복하다. 있을 자리에 있는 사람은 ‘답다’와 통한다. ‘선생님답다’ ‘주부답다’ ‘학생답다’ ‘직장인답다’ 등등. 자신의 본분을 잘 지키고 성실히 일하는 사람한테 우리는 ‘답다’라는 표현을 쓴다. 특히 책임감의 다른 표현인 ‘답다’의 무게를 크게 느껴야 될 직업은 정치가다.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개인의 욕심이나 채움에 연연하지 않고 공익을 우선해야 한다. 있을 자리에 있는 사람이 많아야 행복하고 따뜻한 세상이 된다.

조연경 드라마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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