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보도가이드라인 다 지키면서 어떻게 쓰냐 묻는 기자들에게
전국언론노동조합 성평등위원회가 지난달 ‘젠더 보도 가이드라인’을 펴냈다. 성평등 보도의 실천을 위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다양한 사례와 함께 체크리스트 형태로 만든 것이다. 인쇄본 기준 90페이지에 달하는 가이드라인을 본 기자라면 이런 뾰족한 생각이 들 법도 하다. ‘그럼 대체 어떻게 취재하고 기사 쓰란 말이야?!’
이미 많은 보도준칙이 있는 상황에서 젠더 보도 가이드라인이 현장 기자들에게 또 하나의 ‘제약’처럼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이번 가이드라인을 만든 김수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도, 가이드라인 제작에 참여해 현장의 의견을 들려준 기자들도 가이드라인이 단 하나의 정답이라고 말하진 않는다. 이들은 가이드라인은 논의의 시작이라며, 언론이 성평등 관련 이슈를 다루면서 이제껏 해왔던 고민을 나누고 사례를 축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입을 모았다.
“우리에겐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
언론노조 주최로 11일 열린 ‘성평등 보도를 위한 저널리즘 원칙 점검’ 토론회에서 김수아 교수는 “A가 맞고 B가 틀리다고 판별을 내리는 것보다 고민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가령 성범죄 등 젠더 기반 폭력 보도에서 사용되는 이미지 문제가 있다. 가이드라인은 해당 이미지가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반영하지 않는지, 사건의 내용을 불필요하게 재연하진 않는지 점검할 것을 제안한다. 그런데 이걸 다 따지고 지키다 보면 관련 이미지 없이는 뉴스 제작을 할 수 없는, 특히 방송 기자 같은 경우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부닥치게 된다. “의미 없는 나무만 보여줄 순 없잖나.” 류란 언론노조 SBS본부 공정방송실천위원장이 던진 물음이다. 류 위원장은 “가이드라인으로만 얘기하다 보면 현장 기자들은 뉴스를 만들 수 없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며 “가이드라인은 논의의 시작이 돼야 한다. 원칙을 지키면서 뉴스를 만들려면 어떻게 할 수 있는지에 관한 논의는 이제 시작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수아 교수는 언론이 게티이미지뱅크 같은 아카이브를 활용해 ‘악마 같은 가해자와 무력한 피해자’ 같이 고정관념에 기반을 둔 이미지를 사용하는 문제 등을 지적하면서도 “매번 이미지를 제작하는 게 데일리 환경에선 쉽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인정했다. 그래서 “언론계가 함께 성평등 이미지 아카이브를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김 교수는 “우리에게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한국 드라마에서 남자가 여자 손목을 잡고 끌고 가는 장면이 많다는 게 계속해서 문제로 지적되니까 남성과 여성이 다른 방식으로 멈춰서 대화하는 표현들을 만들어내게 되지 않았냐”면서 “이런 방식으로 지금까지와는 달랐던 것들을 아카이빙할 필요가 있다. 기사 수정 혹은 모범 보도 사례 등 아이디어를 축적해나가는 게 필요하다”고 밝혔다.
언론노조 SBS본부가 언론사 최초로 ‘성평등언론실천상’을 제정해 지난 2월 첫 시상을 한 것도 이런 맥락에 있다. 류란 위원장은 “상을 만든 목적이 수상자를 결정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수상자로 결정된 사람들이 자기가 현장에서 어려운 과제를 어떻게 해결해왔는지, 그 경험담을 듣는 게 중요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수상자들은 육아휴직 리포트에서 화면의 성비를 맞추려 했던 노력, 성폭력 사건 리포트에서 느끼는 딜레마와 나름대로 찾은 타협점 등을 상세히 공유했고, SBS본부는 이를 기사로 제작해 사내외에 알렸다.
신문·TV선 지켜도 유튜브나 OTT는 괜찮다?
문제는 신문 지면이나 TV 뉴스에선 성평등 보도의 원칙이 어느 정도 지켜지거나 그런 시도라도 있지만, 온라인 특히 유튜브 등의 OTT는 다른 기준으로 판단된다는 점이다. 가이드라인은 레거시 미디어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반면, “OTT는 시민 규제의 틀이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에 지상파에선 불가능한 것들을 여기(OTT)서 풀어놔야겠다 하면서 생기는 이슈인 것 같다”고 김수아 교수는 밝혔다.
홍남희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도 “언론사 차원에서 전통 언론의 기조와 유튜브 같은 SNS 채널의 방향성을 양분해서 가져가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언론사가 디지털화 과정에서 ‘투 트랙 전략’을 취하면서 생기는 문제다. 홍 교수는 “전통 언론은 가이드라인과 보도준칙을 잘 지킨다 해도 다른 트랙, 다른 채널에선 안 지켜도 된다고 생각하거나, 자회사를 둔다거나 하는 식으로 상업화된 뉴스를 생산하는 전략을 취했을 때 수용자는 어디서 생산됐는지 점검하지 않기 때문에 생산자 입장에서 고민을 이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런 문제가 발생한 근원 중 하나가 “포털을 통한 뉴스 소비 관행”이라고 지적한 뒤 “댓글을 시민 참여로 여기고 규제 없이 내버려 두는 상황들 때문에 피해자 성별을 제공했을 때 불필요한 추측과 루머가 댓글란을 통해 양산돼 취재 시 예상하지 못한 효과가 발생하게 된다”며 “결국 포털이 댓글을 어떻게 규제하고 처리할 것인가 이 부분의 협업이 되지 않고 남게 된다”고 했다. 성평등 보도에서 플랫폼 이슈를 간과할 수 없는 이유다.
“기자 개개인, 특히 데스크 교육 중요…각개전투로는 안돼”
결국 중요한 건 기자 개개인의 변화와 이를 통한 언론사 전반의 변화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언론노조 MBC본부에서 성평등위원장을 지낸 조효정 MBC 기자는 “제도와 시스템도 중요하지만 결국 이 모든 게 사람이 하는 일”이라며 “기자 개개인이 교육되지 않으면 이런 상황의 획기적 개선은 힘들지 않은가 한다”고 말했다.
조 기자는 “신입 기자 교육은 물론 데스크, 특히 문제 되는 보도를 많이 다루는 데스크 교육을 꾸준히 하고, 외부 모니터링을 통해 보도 당사자와 해당 기사의 책임 데스크에게 메일을 보내 젠더 감수성에 위배되거나 피해를 유발하는 문제 등을 지적해줄 필요가 있다”며 “자꾸 까먹기 때문에 리마인드(상기) 시켜주는 것 외에는 사실 방법이 없는 게 아닌가”라고 했다.
언론노조 연합뉴스지부에서 성평등부장을 맡고 있는 오예진 연합뉴스 기자는 “언론사 전반, 언론사 내의 광범위한 합의가 부재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오 기자는 “각 언론사, 각 데스크에서 각개전투를 하며 고민하고 기사를 쓰지만, 예를 들어 사회부에서 기자와 부장이 합의해서 ‘저출산’ 대신 (성평등 용어인) ‘저출생’이란 표현을 쓰더라도 정치부와 경제부, 산업부로 퍼져 나가지 않는다”며 이렇게 말했다.
오 기자는 “이런 자리(토론회)가 마련된 것 자체는 의미 있지만, 그 의미가 정말 흔적을 만들고 변화를 만들기 위해선 언론사 전반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서 “SBS본부처럼 상을 제정한다거나 해서 좀 더 체감할 수 있는, 동기(動機)를 만들어야겠다는 걸 절감하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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