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만 피한 주민들 “우르르 쾅쾅…불 소리 너무 무서웠다”

산불 피해 체육관에 모인 이재민들 강원 강릉시에서 발생한 산불이 강풍을 타고 확산된 11일 긴급 대피한 주민들이 강릉 아레나에 모여 있다. 대한적십자사 강원지사 관계자들은 이재민을 위해 재난구호 셀터를 설치했다. 강릉 | 조태형 기자 phototom@kyunghyang.com

강릉 아레나에 450여명 대피
불탄 집 사진 보며 “어떡하냐”

오후 주불 진화 소식에 안도
큰 피해 없는 시민들은 귀가

“23년 된 집이 순식간에 타버렸어요.”

11일 오후 4시 강원 강릉 산불로 임시 이재민 대피소가 차려진 강릉 아이스아레나에서 만난 이동하씨(60)는 붉어진 눈으로 휴대전화 속 자신의 집 사진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씨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은 붕대로 친친 감겨 있었다. 그는 산불이 나자 3시간 동안 집에 난 불을 끄기 위해 호스로 물을 뿌리다 화상을 입었다고 했다.

이씨는 “방금 이웃이 ‘우리집이 다 탔다’며 보내온 사진”이라면서 사진을 보여줬다. 목조주택이 전부 타버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이씨는 믿기지 않는 듯 사진을 확대해보길 반복했다. 이씨는 23년 전 이 집을 짓고 살아왔다고 했다. 그는 “나무로 만든 집이라서 금방 홀라당 타버렸다”며 “불을 끄다가 옷이 시꺼멓게 돼 입고 있는 반소매 티셔츠마저 지인에게 빌려 입은 것”이라고 했다.

옆에 있던 부인 안영순씨(60)도 “우르르 쾅쾅 소리가 들렸는데 그게 소나무가 타는 소리였다. 태어나서 불 나는 소리가 그렇게 무서운 줄 처음 알았다”고 했다.

이날 강릉 아이스아레나에는 이재민 450여명이 대피해 있었다. 바닥에 깔린 은색 돗자리에 앉아 있던 시민들은 미처 짐도 챙기지 못한 모습이었다. 시민들이 가져온 짐이라고는 장바구니나 손가방, 보자기에 싼 것 등이 전부였다. 이재민들은 대피소에서 “우리집이 다 탔다는데 어떡하냐” “가슴이 아직도 벌렁거린다”며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강풍을 타고 날아온 불씨는 차주일씨(66)의 집과 논밭을 모두 태워버렸다. 차씨는 이날 산불로 5년 전 새로 지은 집이 모두 타버렸다고 했다. 차씨는 “논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집에 불이 붙은 걸 보고 안전한 곳으로 피했다”며 “불이 총알 날아오듯이 그렇게 빨리 날아오는 건 처음 봤다”고 했다. 이날 오후 주불 진화가 완료됐다는 소식에 시민들은 안도했다. 큰 피해가 없는 시민들은 대피소를 떠나 귀가하기도 했다.

이날 오후 강릉시 사천면 사천중학교 체육관에 마련된 임시 대피소에 머무르던 박매자씨(74)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챙기고 있었다. 순포리에 사는 박씨는 산불을 피해 이날 오전 10시쯤 이곳으로 왔다. 그는 “동해안이 불에 탔던 20여년 전 산불이 떠올랐다”며 “산불이 거센 바람을 타고 집 근처로 날아올까 무서웠다. 대피하라는 안내를 받고 아들과 함께 이곳으로 대피했다”고 말했다.

강원도에선 2000년 4월7일 고성에서 산불이 나 삼척, 동해, 강릉, 경북 울진 등 2만3794㏊를 태운 뒤 4월15일 진화됐다. 당시 2명이 숨지고 15명이 다쳤다. 이곳에 머물던 시민들 역시 주불 진화 소식이 전해지자 안도하며 하나둘씩 귀가했다. 강릉시 관계자는 “산불 위험지역 주민 19가구 29명이 대피해 있었다”며 “비가 내리고 주불 진화 소식을 들은 주민들이 상당수 귀가해 현재는 몇명만 남은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강릉 | 이삭·김송이 기자 isak84@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