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위조된 정보라 문제없다’는 대통령실, 도청은 눈감는 건가
정부가 미국 정보기관의 도·감청에 의해 작성된 걸로 보이는 기밀문서 유출에 대해 문제 삼지 않겠다고 했다. 문서에 담긴 내용 상당수가 위조됐다는 이유를 들었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타국의 불법적인 주권침해 행위에 먼저 사실관계를 따져보는 게 순서인데, 유독 한국은 섣불리 미국에 면죄부를 주려 한다. 독립적인 주권국가가 취할 자세는 아니다.
대통령실은 11일 입장문을 내고 “미 정부의 도·감청 의혹에 대해 양국 국방장관은 ‘해당 문건의 상당수가 위조됐다’는 사실에 견해가 일치했다”며 “굳건한 한·미 정보 동맹을 통해 양국 신뢰와 협력체계를 보다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의 도·감청이 있었는지, 무엇이 위조됐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앞서 두 국방장관은 미국 측 요청으로 통화하며 긴밀한 소통과 협력을 다짐했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한·미 정상회담 의제 협의차 출국하며 한국이 이 문제를 제기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오히려 김 차장은 “미국은 세계 최강의 정보국”이라며 “그러한 미국의 능력과 역량을 우리가 함께 업고 활동한다는 것은 큰 자산”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상대방은 동맹국 정부를 믿지 못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보를 캐내는데, 한국은 미국의 그런 능력 덕분에 더 안심할 수 있다며 자위하는 모습이다. 국빈 방미 성공에 모든 것을 건 나머지 이성적인 사고가 마비된 것인가. 대통령실은 미국의 불법행위를 감싸는 데 그치지 않고 되레 정당한 국내 문제제기에 “한·미 동맹을 흔드는 자해 행위이자 국익침해 행위”라고 성내고 있다. 유출된 문서 내용도 문제다. 정부가 부인하지 않는 걸 보면, 한국이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우크라이나 군대가 쓸 포탄을 폴란드를 통해 우회 수출하기로 한 것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한국이 표면적으론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수출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대통령의 국빈 방미를 따내기 위해 그 원칙을 훼손했고 그마저도 숨겨왔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사안은 프랑스·이스라엘 등 다른 나라들도 연관돼 있어 한국 대통령실 의지와 무관하게 파장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공개된 문건이 빙산의 일각일 수도 있다. 정부는 미국 측에 문제의 핵심인 도청이 있었는지 따져 묻고, 사실이면 사과와 재발 방지를 요구해야 한다. 그렇게 해도 한·미 동맹은 흔들리지 않는다. 반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한·미관계가 건전하게 가기 어렵다. 우리를 믿지 못해 정보를 훔치려 하는 상대와 그 정도의 신뢰를 갖고 무엇을 함께 도모할 수 있겠는가. 동맹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뿐이라는 점을 되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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