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도청 의혹…윤석열과 박정희 정부의 닮은꼴 대응

강혜인 2023. 4. 11.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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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출된 미 정보기관의 기밀자료 더미에 한국 대통령실 산하 국가안보실을 도청한 것으로 추정되는 문건이 나왔으나 대통령실은 '위조 문건'이라는 취지의 입장을 내고 사안을 뭉개려는 모양새다. 미국에 입장 요청을 할 계획도 없다고 밝혔다. 

지난 70년대에 미국 중앙정보국 CIA가 박정희 청와대를 도청한 사실이 드러나자 한국정부가 미국 측에 항의하기는커녕 도청 사실을 공식 부인해달라고 미국에 요청했던 비굴한 모습과 겹쳐진다. 

대통령실은 오늘(4월 11일) 미국의 도감청 의혹과 관련해 "'미 정부의 도감청 의혹'에 대하여 양국 국방장관은 '해당 문건의 상당 수가 위조됐다'는 사실에 견해가 일치했다. 앞으로 굳건한 '한미 정보 동맹'을 통해 양국의 신뢰와 협력체계를 보다 강화해 나갈 것"이라는 입장문을 냈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도 11일 인천공항에서 방미 전 기자들과 만나 "오늘 아침에 양국 국방장관이 통화를 했고 공개된 정보 상당수가 위조됐다는 데 대해서 한미의 평가가 일치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번 문서 유출이 한미 관계에 변수가 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변수가 될 수 없다. 미국은 세계 최강의 정보국"이라며 "미국의 능력과 역량을 함께 얻고 활동한다는 것은 큰 자산이고 이번 기회에 양국 신뢰가 더 강화될 것으로 생각한다"는 답변을 내놨다.  

김 차장은 '미국 측에 어떤 입장을 전달할 계획이냐'는 물음에 "(전달)할 게 없다"며 "왜냐하면 누군가가 위조를 한 것이니까. 따라서 자체 조사가 좀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답했다. 

대통령실과 김태효 차장의 발언을 종합하면 윤석열 정부는 미국의 도감청 의혹 관련해 미국 정부의 조사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상당수 문건이 위조라는 결론을 내리고 미국 측에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기밀 문서의 진본 여부에 대해 미국보다 더 강한 부정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달 말로 예정돼 있는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 전까지 논란을 조기 진화하고자 하는 눈치다. 

미국은 "가짜 문서는 아니다"라는데...한국은 '위조' 강조

하지만 미국 법무부 등은 기밀문서 유출 경위 등에 대해 조사에 착수했다. 미국 정부는 CIA 등 여러 정보기관에서 취합한 국방부 기밀 문서가 다량 유출됐고, 이는 국가안보와 정보 문제와 직결된다고 보고 있다. 다만 미국 국방부는 유출 문서 관련 언론 회견에서 일부 문서가 수정(some of these images appear to have been altered)됐거나, 변조(some slides have been doctored)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유출 문건은 대부분 기밀 정보가 담긴 프리젠테이션 자료를 출력해 촬영한 형태로 보인다. 수정 또는 변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문서는 지난 3월 1일자로 작성한 우크라이나 전쟁 전황도이다. 러시아군 사상자 규모가 공식 발표 수치와 다르다는 점에서 수정 또는 변조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으나 아직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전략소통조정관은 10일(현지 시간) 브리핑에서 "이런 문서가 공개된 것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며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문서의 진본 여부에 대해서는 "모든 문서의 진위여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말할 수 없다"며 즉답을 피했다. 그러면서도 "(유출된 문서가) 가짜 문서(spurious documents)라고 말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 인터넷 커뮤니티에 퍼진 우크라이나전쟁 3월 1일자 전황도 이미지. 러시아(16,000~17,500)와 우크라이나(61,000~71,500) 전사자를 나타내는 숫자가 변조됐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출처: 트위터)  
▲ 위 전황도의 원본으로 추측되는 이미지에 나오는 전사자 수. 러시아 35,500~43,500명. 우크라이나 16,000~17,500명. (출처: 트위터)   

유출 문건 속 '김성한-이문희 대화 내용'

앞서 지난 6일(미국 현지 시간) 미국의 기밀 문서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개됐다는 내용이 뉴욕타임스 등 현지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유출 문건에 따르면 미국은 지난 3월 1일 한국 이문희 전 대통령실 외교비서관과 김성한 전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이 나눈 NCS(국가안전보장회의) 관련 대화 내용을 파악하고 있었다. NSC는 한국 정부의 외교안보 컨트롤 타워다.  

미국이 파악한 이들의 우크라이나 포탄 제공 관련 대화 내용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NSC는 한국이 미국의 요청에 응해 (우크라이나에: 편집자 추가) 포탄을 제공할 경우, 미국이 최종 사용자(end user)가 아닌 게 될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를 걸지 않을까 우려도 있다. 이 이슈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세우지 않고서는, 정상간 통화를 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 한국은 살상 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정책을 어길 수 없으며, 공식적으로 정책을 바꾸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지다. 임기훈 국방비서관이 3월 2일까지 최종 입장을 결정한다고 약속했다. 
- 이문희 전 비서관

이 이슈가 국내에서 어떻게 인식될지 우려된다. 윤 대통령의 방미 일정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기 위한 정책 변경과 함께 발표되면, 대중들은 이 두 사안이 맞교환됐다고 생각할 것이다. 
- 김성한 전 실장

김 전 실장은 이어 폴란드를 경유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미국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우크라이나에 빨리 포탄이 지원되는 것이니, 155mm 포탄 33만 발을 폴란드에 판매하는 방안이 있다. 
- 김성한 전 실장

폴란드가 포탄의 '최종 사용자'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고, 우크라이나에 포탄을 보낼 수 있다. 무기수출과 관련해 선진국을 최종 사용자로 지정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 초안이 준비되고 있지만, 폴란드가 어떻게 할지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 이문희 전 비서관

미국이 한국 대통령실 관계자들의 대화 내용을 어디에서 어떻게 확보했는지는 유출된 기밀 문서에 적혀있지 않다. 이들의 대화가 어디에서 이루어졌는지, 회의 내용이었는지 아니면 통화 내용이었는지 등도 문건 내용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이 문건에는 "TS//SI-G//OC/NF"라는 분류 코드가 적혀 있다. 'TS'는 Top Secret(1급 기밀), 'SI-G'는 SI-Gamma, 'OC'는 Originator Controlled(문서의 생산자가 배포 및 추출을 통제), 'NF'는 Not releasable to Foreign nationals(외국(군) 공유 불가)를 의미한다. 

SI-G의 'SI'는 Special Intelligence(특수 정보)를 의미한다. 특수 정보는 통상 통신 감청 혹은 SIGINT(Signals Intelligence·신호 정보)를 이용해 획득하는 정보를 뜻한다. 'Gamma'는 통신 정보(COMINT)의 하위 개념으로, 매우 민감한 통신 감청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석열 정부의 대응은 박정희 정권의 미국 도청 대응 방식과 닮은꼴

윤석열 정부가 이번 국가안보실 도감청 의혹에 대응하는 태도는 7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 미 정보기관 CIA의 청와대 도청 사건과 관련해 당시 한국 정부가 보였던 비굴한 자세를 연상하게 만든다.

지난 1976년 10월 15일자 워싱턴포스트는 박동선의 대미 로비 사건(코리아게이트)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미국이 한국 정부 최고위층 등 극도로 민감한 정보원과 도청 및 전자감시를 통해 박동선의 미국 의회 의원 매수 관련 정보를 수집했다고 폭로했다. 미 정보기관의 한국 도청 의혹이 언론 보도를 통해 처음으로 제기된 것이다.

1977년 6월 19일자 뉴욕타임스 1면 (출처: 뉴욕타임스 아카이브)

이듬해인 1977년 6월 19일자 뉴욕타임스는 "미국이 한국 대통령을 도청한 것으로 알려졌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CIA의 청와대 도청설을 훨씬 자세하게 보도했다. 미국 정보기관이 전파 빔(radio wave beam)을 쏴서 청와대 내부 음성을 전자적으로 탐지하는  기술을 이용해 청와대 내부를 도청했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이 기술이 도청 장비를 목표 시설 내부에 심을 필요가 없이 외부에서 원격으로 내부 대화 음성 등을 도청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의 보도 이후 한미 양국 외교라인에서는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재미 언론인 안치용 기자가 쓴 박정희 대미 로비 X파일에 따르면 1976년 11월 2일 당시 주한미국대사 리처드 스나이더가 본국에 보낸 비밀 전문에서 당시 한국 외무부장관 박동진이 자신을 불러 "제발 미국 정부가 청와대 도청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공식적으로 부인해달라"라고 강력하게 요청했다고 밝혔다. 

미 유력지가 CIA의 청와대 도청 의혹을 보도했으나 한국 정부는 미국에 항의하기는커녕 물밑에서 오히려 없는 일로 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까지 주한미국대사를 지낸 윌리엄 포터도 1978년 미국 CBS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청와대를 도청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미국 정보기관의 한국 도청 의혹은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지난 2013년 미 국가안보국 NSA와 미 중앙정보국 CIA에서 일한 에드워드 스노든이 미국 정보기관의 도청 문서 수천 건을 언론에 폭로했다. 당시 스노든에게서 문건을 입수해 보도한 가디언 기자 글렌 그린왈드는 뉴스타파 취재진과 만나 NSA가 한국도 도청했다고 밝힌 바 있다.

2016년에는 기밀문서 폭로 전문사이트인 위키리크스가 당시 유엔사무총장 반기문과 독일 총리 메르켈 등 세계 각국 정상 대화 등을 무차별 도청했다고 폭로했다. 

뉴스타파 강혜인 ccbb@newstap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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