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원 외국인 가사도우미’ 법안 단상
[세상읽기]
[세상읽기] 장영욱 |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잠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일한 적이 있다. 당시 같은 연구실을 쓰던 스웨덴 출신 방문교수와 종종 남아공 생활에 관한 얘기를 나누곤 했다. ‘복지천국’에서 왔으니 남아공 생활이 불만족스럽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웬걸 정반대였다. 스웨덴에서보다 훨씬 넓은 집에 살면서, 주말마다 와인농장에 딸린 고급 레스토랑에서 외식하고, 싼값에 여행도 더 자주 다닐 수 있는 삶을 만족스러워했다.
그 말에 수긍이 갔다. 스웨덴이나 내가 공부했던 영국에선 중산층의 삶이 저소득층보다 압도적으로 좋다고 할 수 없다. 땅값이 비싸 웬만큼 부자 아니면 넓은 집에 살기 어렵다. 높은 인건비와 서비스 요금 탓에 외식은 부담스럽고, 집이나 차 수리도 대부분 직접 한다. 반대로 소득이 낮아도 삶의 질이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높은 최저임금에 무상의료, 주거급여, 실업수당 등 각종 복지제도가 갖춰져 있고, 괜찮은 식자재를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 선택지도 다양하다. 돈이 많으나 적으나 삶의 질은 어느 정도 균등하다.
반면 남아공은 중산층과 빈곤층 사이 격차가 크다. 낮은 인건비 때문이다. 남아공 최저시급은 25랜드(약 1700원), 우리 돈으로 한달 30만원이 채 안 된다. 서비스업 물가가 낮아 외식비도 저렴하고, 집안일에 사람을 써도 부담이 덜하다. 어느 정도 소득이 있으면 남아공에선 제법 여유롭게 살 수 있다. 스웨덴보다 남아공이 ‘지상천국’에 더 가까운지, 유럽의 은퇴한 연금생활자들이 남아공에 꽤 많이 살고 있다.
하지만 ‘선택받은 계층’에 속하지 않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낮은 인건비는 노동자의 몫이 그만큼 적다는 뜻이다. 최저임금 월 30만원가량에 약간의 정부보조금을 더해도 생계유지가 어렵다. 빈곤층은 무허가 판자촌 ‘타운십’의 좁은 집에서 다닥다닥 모여 산다. 공공서비스가 미비해 제대로 된 교육이나 진료를 받을 수 없다. 선택받은 자들이 천국을 누리는 동안 그 밑을 떠받치는 이들은 지옥을 산다.
이들의 삶도 개선되긴 한다. 대신 매우 더디다. 노동자에게 더 많은 몫이 배정될수록 선택받은 자들의 삶은 덜 윤택해지기 때문이다. 남아공에서는 불과 4년 전에야 최저임금제가 도입됐다. 그렇게 낮은 최저시급이건만 재계는 시장 논리를 내세워 저항했다. 나쁜 조건에도 일할 사람이 넘치니 사용자로선 임금을 더 줄 이유가 없다. 경영효율화, 노동유연화, 자유시장경쟁 등 미사여구를 동원해 ‘귀한 분들’과 ‘천한 것들’을 분리하고 좋은 일자리는 더 좋게, 나쁜 일자리는 더 나쁘게 만든다.
얼마 전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 등이 ‘100만원 외국인 가사도우미’ 법안을 발의했다. 아이 둘 키우는 아빠 처지에서 솔깃했다. 직장에서의 격무에 이은 집안에서의 육아 부담을 덜기 위해서도, 몇년째 휴직 중인 아내가 일터로 돌아가기 위해서도 값싼 돌봄노동자의 존재가 도움이 될 것 같다. 외국인 노동자에게도 일자리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본국에서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을 기회가 된다니 마다할 이유가 있나 싶다.
그런데 자꾸 남아공 생각이 나는 건 왜일까. 외국인이란 이유로, 본국에서보다 더 나은 대우라는 이유로, 우리 출산율 제고가 시급하다는 이유로 같은 일을 하는 외국인 노동자에게 더 낮은 임금을 주는 게 옳을까. 지난해 6월부터 가사도우미도 인증기관을 통해 계약하면 최저임금을 적용하는 법이 시행 중이다. 또 국제노동기구(ILO)의 ‘가사노동자협약’ 제11조는 가사노동자도 최저임금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같은 협약 제8조에는 외국인도 예외가 아니라고 못박아뒀다. 우리나라 가사노동자가 힘겹게 인정받은 권익의 개선을, 국제협약에 반해가면서까지 외국인에게만 적용 안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선택받은 소수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희생 위에 행복을 누리는 곳을 발전한 사회라 할 수 있을까. 스웨덴에서 오신 그 교수님도, 본인의 만족도와 별개로 남아공이 스웨덴보다 더 나은 사회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저임금 가사도우미 제도가 활성화된 홍콩(0.75명, 2021년 기준)과 싱가포르(1.02명)의 합계출산율은 우리나라(0.88명)와 함께 세계 최하위권이다. 단순히 육아 비용이 더 적은 곳보다는,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곳에서 아이 낳고 키울 생각이 더 커지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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