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누리 칼럼] 국회의원이 늘어야 민주주의가 산다

한겨레 2023. 4. 11.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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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누리 칼럼]민주적인 국가일수록 국회의원 수가 많고, 복지국가일수록 국회의원 수가 더 많다. 한국은 현재 17만명당 의원 1인인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평균(10만4천명당 1인)을 기준으로 하면 490명, 복지국가 평균에 맞추려면 920명은 돼야 한다.
내년 총선에 적용할 선거제 개편안을 논의하기 위한 국회 전원위원회가 10일 오후 국회에서 나흘 일정으로 개최돼 여야 의원들이 난상토론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김누리 | 중앙대 교수·독문학

우리는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사실 한국 민주주의는 세계가 경탄하는 민주주의다.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2016년 겨울 독일의 권위지 <디 차이트>에는 “이제 미국과 유럽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배워야 한다”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다. 민주화의 열기가 뜨겁던 시절 홍콩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타이와 미얀마 등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나라에서는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가 운동가들의 필독서였다. 한국 민주주의는 ‘근대 민주주의의 종언’이 운위되던 서구에서 민주주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로 상찬됐고, 동방에서는 ‘아시아 민주주의의 상징이자 희망’으로 칭송받았다.

이런 경이로운 민주주의를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오늘날 ‘헬조선’이 됐다. 자살률, 출생률, 불평등, 양극화, 행복지수, 노동시간, 산업재해, 성평등, 사회적 갈등 등 거의 모든 지표에서 ‘세계 최악의 국가’로 공인받고 있다. 이런 불가사의한 현상은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한국 민주주의에 심각한 구조적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의민주주의는 국민의 의사를 올바로 ‘대의’하지 못한다. 대의민주주의의 핵심은 결국 국민의 의사를 대신 표명할 대표를 뽑는 선거 과정인데, 이 과정이 국민의 의사를 굴절하고 왜곡하는 방향으로 변질했기 때문이다.

대의의 왜곡과 관련해, 지난주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의 발언은 곱씹어볼 가치가 있다. 한국 민주주의의 퇴행성을 보여주는 징후적인 발언이기 때문이다. 그는 의원 수를 “최소 30명 이상 줄일 수 있다고 본다”며 “의원 정수를 줄여야 한다는 응답이 57%, 늘려야 한다는 응답은 9%에 불과했다”는 한국갤럽 여론조사를 근거로 들었다. 이와 비교해 민주당은 최소 300석 유지를, 정의당은 360석까지 증원을 주장한다.

국회의원 정원과 관련된 이러한 주장은 두가지 사실을 환기한다. 첫째, 보수적인 정당일수록 국회의원 수를 축소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고, 둘째, 국민 대다수가 국회의원 수 축소를 지지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박명림 연세대 교수가 최근 한 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길을 묻다’라는 연속 칼럼은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국회의원 수가 급감한 것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의 일이라는 사실이다. 1948년 제헌의회 이래로 한국의 의원 수는 인구 10만명당 1명 의원을 선출하는 것으로 세계적인 표준과 일치하는 수준이었다. 즉, 제헌의회의 의원 수 200명은 당시 인구 2천만명에 정확히 조응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군사쿠데타 이후 20만명당 1인으로 급감했다. 만약 제헌의회 당시의 인구비례 원칙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오늘날 국회의원 수는 515명 수준은 돼야 한다.

또 하나 의문은 왜 한국인들 대다수가 국회의원 증원에 반대하느냐는 것이다. 거기엔 무엇보다도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정치혐오의 정치학 때문이다. 역대 정권은, 특히 권위주의적 정권일수록, 정치혐오를 조장하고, 정치혐오를 더 세련된 정치적 취향인 양 선전해왔다. 국민이 정치로부터 취하는 거리가 멀수록 그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길은 가깝기 때문이다. 둘째는 대통령제 아래에서의 국회 불신 때문이다. 의원내각제와는 달리 대통령제에서는 국회에 대한 불신을 권력정치의 주요 전술로 활용해왔다.

국민의 정치혐오와 국회 불신은 대단히 시대착오적이고 자기부정적인 것이다. 오늘날의 시대정신에도 맞지 않고 우리가 이룬 위대한 민주주의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국회의원 수가 해당 국가의 민주주의와 복지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는 사실을 이제는 인식해야 한다. 민주적인 국가일수록 국회의원 수가 많고, 복지국가일수록 국회의원 수가 더 많다. 한국은 현재 17만명당 의원 1인인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평균(10만4천명당 1인)을 기준으로 하면 490명, 복지국가 평균에 맞추려면 920명은 돼야 한다. 우리가 놀라운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실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 특히 복지국가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국회의원 수가 너무 적은 것과도 관련이 깊다.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대의의 위기다. 지금 국회 전원위원회에서 논의 중인 선거법 개정은 사표 최소화와 적정 수준의 의원 규모 실현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비례대표제 강화와 선진복지국가 수준의 의원 규모 확보는 이번 개정 논의의 핵심이어야 한다. 특히 군사독재 정권이 줄여놓은 의원 정수는 과거청산 차원에서도 반드시 복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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