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유일 ‘거북선’ 복원해 대표 관광자원 만들어야죠”

강성만 2023. 4. 1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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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짬] 로켓 과학자 채연석 전 항우연 원장

“세종 때 만든 대신기전은 발사체 길이가 대나무 꼬리를 포함해 5.5m나 되는데요. 이런 크기 로켓은 외국에도 200년 뒤에나 나옵니다. 조선은 태종과 세종, 문종 50년 동안 이룬 화약 무기 개발로 500년 가까이 유지할 수 있었죠.” 조선 화약무기 전문가인 채 위원장이 인터뷰를 마치며 한 말이다. 강성만 선임기자

“어릴 때 꿈을 가지고 노력을 꾸준히 많이 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이야기를 꼭 하고 싶어요. 제 경험이니까요.”

초등 4학년 때 학교 게시판에 붙은 미국과 옛 소련의 우주 탐사 뉴스를 보고 로켓 과학자를 꿈꾼 채연석(72)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 위원장은 1989년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 창설 멤버로 들어가 1대 우주추진기관 연구개발팀장을 10년 가까이 맡았다. 그는 이때 30여명 연구원들과 함께 한국의 첫 액체연료 로켓 ‘케이에스알(KSR)-3’을 만들어 2002년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 100% 국산 기술로 제작된 이 로켓은 지난해 누리호 발사 성공으로 이어진 한국 우주개발 성취의 단단한 밑돌이 되었다는 평을 듣는다. 그는 2002년부터 3년 동안 6대 항우연 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로켓 과학자’ 채연석은2015년 이탈리아 로마 여행 때부터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침략으로 망할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한 군선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과학문화 유산인 거북선을 제대로 복원해 한국의 대표 관광 자원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최근 ‘18세기 거북선’의 구조와 규모, 외형, 함포배치 등을 밝힌 논문을 발표한 채 위원장을 지난 7일 대전 연구실에서 만났다.

그가 논문 집필과 함께 제작한 거북선 모형은 우리가 알던 거북선과 많이 다르다. 우선 상단부가 둥글지 않고 앞에서 보면 마치 챙모자처럼 주갑판(상장) 중심 부분만 세로로 덮개를 씌웠다. 상장의 길이와 폭은 각각 85척(26.6m)·32척(10m)으로 기존 연구보다 폭이 조금 커졌다.

그는 논문에서 1793년~1794년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신대현이 1809년(순조 9년) 작성한 상소를 근거로 1795년 왕명으로 편찬된 <이충무공 전서> ‘귀선도설’의 거북선 구조와 치수에 대한 설명을 ‘18세기 거북선의 설계도’로 볼 수 있다는 논지를 폈다. 신대현의 상소에는 ‘거북선의 도식이 <이충무공 전서>에 상세히 실려 있어 한 번 보기만 하면 알 수 있는데 근래 거북선은 다른 배와 다름이 없다’며 ‘앞으로 <이충무공 전서>에 나오는 (거북선 제작) 제도대로 거북선을 만들고 이를 어긴 게 드러나면 간부를 문책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그가 만든 거북선 모형도 ‘귀선도설’ 설계에 따른 것이다. 상장을 챙모자처럼 씌운 것은 ‘귀선도설’의 거북선 그림과, 거북선과 판옥선 1층(바다에 잠기는 부분)과 2층(1층과 갑판 사이) 규격이 같다는 조선 수군의 장계 사료(<각사등록> ‘통제영계록’)를 바탕으로 추론한 것이다. “1·2층 규격이 같다면 상장 위 3층도 무게가 같아야죠. 무게가 늘면 배가 전복되잖아요. 거북선의 기능을 봐도 전부 다 씌울 이유가 없어요. 포수를 보호할 수만 있으면 됩니다. 포 구멍을 내기에도 둥근 벽보다는 수직 벽이 좋죠.” 그는 “‘귀선도설’ 거북선 그림은 언뜻 전부 씌운 것 같지만 실제는 판자 22개 중 10개가 갑판으로, 나머지는 6개씩 벽과 지붕으로 사용됐다”고 밝혔다.

채 위원장이 복원한 18세기 거북선 모습. 채연석 제공

그가 거북선의 상장 폭을 더 넓게 본 것은 1882년 조선 수군의 장계 자료에 나온 거북선과 판옥선 크기가 바탕이 됐다. “‘귀선도설’에 거북선 상장의 크기 수치가 빠져 있어 그동안 연구자들은 여객선인 조선사신선 자료를 바탕으로 계산했어요. 하지만 일본을 오가는 사신선과 함포를 싣고 근해에서 싸우는 거북선은 특성이 달라 규격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죠.”

그의 전통 화약 무기에 대한 관심은 고교 시절로 올라간다. 국사 시간에 최무선(1325~1395)이 18가지 화약 신무기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이 중 혹시 로켓이 있는지 강렬한 호기심이 들었다. 경희대 물리학과에 들어간 뒤 연구에 착수한 그는 2학년 때 조선 초에 독자적으로 개발한 화약무기 23종을 그림과 함께 자세히 설명한 <국조오례도서> ‘병기도설’을 찾아내 14세기말 조선에도 ‘주화’(‘신기전’ 초기 형태)라는 로켓이 있었음을 밝혀냈다. 이 연구에 흥미를 느낀 역사학자 이기백 선생의 권유로 그는 대학원 1학년 때 한국역사학회 회보에 ‘주화와 신기전의 연구-한국 초기(1377~1600)의 로켓에 대하여’ 논문을 발표했다.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8~79년에는 정부 요청으로 행주산성에 전시할 조선 화약무기 복원에 나섰고, 항우연 재직 때인 1993년에는 대전엑스포를 기념해 중·소 신기전과 화차를 처음으로 복원해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 1979~80년에는 거북선을 복원하던 조성도 해군사관학교 교수 요청으로 거북선 배치 화포와 발사물 설계도 맡았다.

초등시절 우주 탐사 뉴스 보고 ‘꿈’
2002년 한국 첫 액체연료 로켓 ‘성공’

2015년 이탈리아 관광하며 ‘착안’
“세계적인 과학유산 거북선 활용”
18세기 ‘이충무공 전서-귀선도설’
거북선 구조 밝힌 논문·모형 발표

그는 8년 전 이탈리아 가족 여행을 하며 거북선 복원의 꿈을 품게 된 시간을 이렇게 기억했다. “이탈리아의 엄청난 로마 유적을 보면서 우리도 세계적인 관광거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때 거북선이 떠올랐어요. 거북선은 외국에 가장 많이 알려진 우리 과학기술 유산입니다. ‘이순신 전투’는 여러 나라 해사 교과서에도 실렸죠. 임진왜란 때 사용된 거북선을 화포 등 기능까지 제대로 복원해 매주 토요일 낮 12시 여수에서 포까지 쏘며 운항하면 세계적인 관광거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5년 전에 ‘함포배치를 중심으로 한 이순신 거북선 구조 연구’ 논문도 발표한 그는 요즘은 ‘임진왜란 거북선’의 구조와 크기 연구에 힘을 쏟고 있다.

‘귀선도설’에 나오는 거북선 외관 그림. 채연석 위원장 제공

로켓과 조선 화약무기 전문가인 채 위원장이 보는 ‘거북선의 위대함’은 뭘까. “세종 때 발사물 길이가 1m90cm나 되는 장군화통이라는 대형 포를 만들었어요. 처음 그걸 보고 왜 만들었을까 궁금했죠. 사정거리가 길어 명중률이 떨어지고 발사물이 폭발하는 것도 아니라 육지 전투에는 큰 효과가 없거든요. 그 의문이 거북선을 연구하면서 풀렸죠. 이 포가 지자총통으로 개량돼 거북선에 배치되었어요. 세종 때 군선에 쓰려고 만든 거죠. 거북선이 적군 장군선을 찾아 가까이 가서 쏘면 명중률이 크게 올라 장군선은 구멍이 뚫려 침몰했어요. 일본 자료에는 거북선이 6~7m까지 근접해 포를 쐈다고 해요. 그때 일본 수군이 조총을 쏘고 칼을 들고 거북선에 타 넘으려고 했지만 거북선 구조상 쉽지 않았죠.”

그는 “조선 수군은 19세기 초에도 거북선을 최소 30척가량 보유했는데 조선이 망하면서 순식간에 사라졌다”는 말도 했다. “문헌을 보면 거북선은 태종 때 처음 만들어집니다. 거북선은 조선해군의 가장 중요한 병기라 임진왜란 뒤에도 장인 한두사람이 대를 이어 계속 만들었죠.”

그가 학생 시절 로켓에 얼마나 열정을 불태웠는지는 대학 2학년 때 펴낸 그의 책 <로케트와 우주여행>이 잘 보여준다. 대학 1학년 때 <학생과학> 잡지사를 직접 찾아가 로켓 연재를 제안해 기고를 시작했고 독자 반응이 뜨겁자 책까지 만든 것이다.

그는 전통 화약무기 연구가 로켓 개발에도 보탬이 되었다고 했다. “‘병기도설’에 화약무기 설계 자료가 나오는데요. 대부분 규격 이야기입니다. 이 자료로 구조를 알 수 있도록 그림을 그리고 설계도를 만들면서 창의력을 키울 수 있었죠. 또 ‘다른 사람이 못 한다고 나도 못 하지는 않는다’는 자신감도 얻었죠. 제가 한국 사람 최초로 신기전이 로켓 화기라는 걸 밝혔잖아요. 전문 인력이나 충분한 재원 없이 한국 최초로 액체연료 로켓 개발에 도전하면서도 문제가 생기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긍정적인 목표를 가지고 시작하면 어떤 형태로든 해결된다는 생각이 늘 제 머리를 지배했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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